맛집 멋집

평양면옥

hl1kfb 2007. 9. 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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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울에 냉면집이 몇개나 되는지 헤아려 본다면 얼마나 많은 냉면집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동네에 두 세개 씩은 있을만큼 흔한 음식점이 냉면집 아닐까?

요즘에는 점주들께서 인테리어도 많이 신경들을 쓰시고 그래서 카페만큼이나 멋들어진

모습을 갖춘 냉면집들도 많이 볼 수 있지만 과연 그 맛은 어떨까?

 

사실 그 많은 냉면집 중에서 육수를 진하게 제대로 뽑아서 시원한 국물맛을 내주는 곳을

찾고자 생각한다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가 된다.

 

사실 내가 서울의 면옥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필동면옥과 평양면옥을 알기전에는 냉면의

'냉'자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쨋든 두 냉면집중에서 먼저 평양면옥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평양면옥은 오장동의 냉면, 설렁탕 골목과 아주 가깝다. 동대문 운동장 5번 출구를 나와서

명동쪽으로 가면 오장동 신라호텔쪽으로 가면 장충동이다.

 

 

 

길을 건너기도 전에 저 멀리 평양면옥의 주차타워가 보인다. 사실 단층짜리 건물 두동에서

저정도의 주차타워를 세워야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장사가 잘된다는 것일까? ㅡㅡa


 

 

주차타워를 따라 차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한국 근-현대 건축사에 큰 획을 그은 김수근

선생의 특징이 잘 묻어나는 경동교회를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신자의 옆모습을 형상화

했다는 형태는 다른 교회건축의 형상에서 자주 차용되고 있고,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공간 구성을 관찰하노라면 저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다.

 

물론 사상적으로나 디자인 적으로나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는 아니지만 나름 대단한

거장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치밀한 건축관은 '공간' 사옥에서 가장

잘 드러나긴 하지만 이 경동 교회에서도 그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어쨌든 경동교회 맞은 편에서 드디어 3대를 이어온 전통의 맛이라는 평양면옥을 찾을 수 있다.

 

 

 

눈속임이 아닌 대다수의 맛집이 그러하듯이 역시나 허름하다. 이날은 날도 춥고,

비도 부슬부슬 내려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한여름에는

이 메밀포대를 비롯한 재료들이 쌓인 창고까지 사람들이 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전통의 면옥답게 지긋이 연세를 잡수신 어르신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도대체 왜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에는 어르신들이 많은 거지...ㅡㅡa

모두들 나의 미모를 보고 따라오신건가? (그럼 나는 꼰대보갈? 혹은 꼰대퀸?)

 

 

 

냉면은 다들 아시다시피 원래 이북음식으로서 메밀을 주원료로 하는 평양냉면과

고구마 및 감자 전분을 주원료로 하여 끊어먹기가 힘든 함흥냉면으로 나뉜다.

 

평양보다 더 북측에 위치한 함흥냉면은 원래 매운 양념장과 뜨거운 육수로 열을 내어

북녁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도록 도와주는 겨울음식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냉면과 함께 온면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이와 반해 평양냉면은 그야말로 냉면의 원조로서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 육수의

한끼의 식사 그리고 해장국 대용으로 전해오던 음식이라

함흥냉면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맛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나오는 메밀 삶은 물에 간장을 약간 첨가하여 마셔보면, 메밀의 고소함을 짭짜롬한

간장이 살려내어 간장을 타기전과 약간이라도 탄 후의 맛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보기에도 푸짐해보이는 접시만두가 나온다. 개수는 여섯개지만 아마도 분식집 만두와

비교하면 배 이상의 양이 될 듯 싶다. 속은 주로 두부, 숙주, 고기 등으로 이집의 음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맵거나 짜서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드럽고 마일드한

맛이다. 어쨋든 음식이 나오자 마자 이미 5년 넘게 알아와서 눈치볼 것도 없는 5명의

전 직장동료들에 의해 게눈 감추듯이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나온 제육! 사실 맨처음에 이집에 갔을 때는 제육이라고 해서 제육볶음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알고 봤더니 푹 삶아진 수육이 나온다. 원래 수육은 잘못 삶으면 냄새가 나서

못 먹는데 이집은 무슨 특별한 비법을 쓰는지 특유의 돼지냄새도 안나고 비계부분도 마치

중국음식중 동파육과 같이 흐물흐물하게 잘 삶아져서 입에 넣는 순간 녹아내릴 듯 하다.

 

여기서 냉면집을 고를 때의 팁을 하나 이야기해두자면, 냉면 없이는 못 사시는 이북출신

어르신들은 냉면집에 수육이 나오지 않으면 그집은 절대로 가시지 않으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육수를 뽑기 위해선 잡뼈가 되었건, 고깃 덩어리가 되었건 반드시 부산물이

발생하는데, 그 주요 부산물인 수육이 없다면 그 음식점은 결국 화학 조미료를 이용하거나

공장에서 육수를 공급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두국이 나왔다. 냉면그릇 가득한 푸짐한 냉면과 고기를 찢은 고명 역시 푸짐하게

올라가있다. 사실 맛을 보기전에는 양에 질릴 정도이다. 육수는 냉면육수와 다를 바 없지만,

아마도 냉면 육수에는 평양냉면의 전통대로 동치미 국물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완벽한 원조 평양냉면의 등장! 맑은 육수에 푸짐한 면발, 반쪽의 계란, 계란 밑의

쇠고기 편육, 오이지, 냉면김치가 올려진 소박한 멋내지 않은 모습이다.

 

사실 이 곳에서 처음 냉면을 먹었을 때 지금까지 먹어왔던 다시다국물 냉면의 맛과 비교하여

너무 밍밍한 느낌이 들어서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간을 맞추기 위해 국물을

한 두모금 떠 마시면서 다른 곳과는 달리 간이 약하고, 잡스러운 맛을 가미하지 않아서

그렇지 국물 자체는 굉장히 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육에 새우젓을

얹어서 아삭아삭한 오이지와 냉면을 함께 입에 넣었을 때 나는 다시는 동네 냉면집을

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말았다.

 

이 깊은 육수맛의 비밀은 주인 아저씨 단 한분 밖에 모르신다고 한다. 소문으로 들은 것이라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강남에도 대형 매장을 열은 주인장은 자식들에게도

이 진한 육수의 비법을 전수하시지 않으시고, 매일 직접 지하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육수의 비율을 조정하신다고 한다.

 

나름 그런 프로의식과 장인정신이 있으셨기에, 일개 냉면집을 장안의 명물로 만드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나온 온면, 평양냉면에 쓰이는 메밀면은 고구마나 감자 전분면과 달리 상대적으로

빨리 퍼진다. 특히나 냉면과는 달리 온면은 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빨리 퍼진다.

그래서 온면은 나오자마자 후룩후룩 빨리 먹는 편이 좋다. 안그러면 우리의 깨작녀처럼

면을 수저로 그야말로 '퍼먹어야'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육수 자체도 다른건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육수와 메밀면의 조합은 차가운 육수와 메밀면의

조합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띈다. 전혀 다른 맛이 난다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는 냉면을 더 추천을 한다. 워낙 거치른 메밀면의 맛이 따뜻한 육수와 만나면서

더 거칠어졌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서울 시내에서 냉면 쫌 먹어봤다 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사실 메밀은 한방적으로

속을 보양해주는 음식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일식의 메밀국수에는 무가 항상

곁들여지고, 우리의 냉면에는 계란과 고기가 곁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맛있는 것을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는다고 계란과 고기를 마지막에 고이 모셔뒀다가

먹을 것이 아니라, 속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가장 먼저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찰떡 궁합이 바로 이 메밀면과 삼겹살 그리고 새우젓이다.

 

항상 음식이라는 것이 궁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냉면을 따로 먹고, 수육과 새우젓을 따로

먹다가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으면 그 세가지 음식이 일으키는 상승효과는

대단해서 전혀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준다.

 

그 반대의 예로는 예전에 유명한 찹쌀 순대를 사와서 동네의 메밀국수집에 음식을 시켜서

한꺼번에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오히려 두가지 음식이 서로를

상쇄시켜 무슨 맛인지 맛을 모르겠었던 경험이 있다.

 

어쨋든 올 여름 들쩍지근하고 시큼하고,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냉면에 질렸다면,

그리고 참된 냉면의 새로운 맛을 느끼고 싶다면 한번 정도는 방문해보자.

그 육수의 은은하고 깊은 자극적이지 않은 맛에 풍덩 빠져들게 될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