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ig

라이카의 역사

hl1kfb 2009. 11. 30. 21:12

<라이카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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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라이카 50주년 당시 라이카가 기로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맹렬한 일본과의 경쟁과 높은 생산원가, 자본의 열세 등에 대응하기 위한 반사식 카메라의 급속한 개발요구와 레인지 파인더 타입 카메라의 불확실한 시장성은 극렬한 변화나 아니면 라이쯔에 의한 카메라 생산 중지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짜이스(Zeiss)는 이미 91년에 카메라 생산을 중단한 상태였다.
 
   라이카 50주년 당시에는 네가지 모델이 시판 되었는데 이 제품들은 1975년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일련의 번호들을 달고 발매되었다. 라이카 플렉스 SL2는 라이쯔의 3번째 반사식 카메라 모델로 순수한 기계식 셔터와 밀러로써 SLR 카메라에 있어 완벽의 절정을 구가하였다. 라이카 M4는 확실한 전통의 토대위에서 클래식 라이카의 계보를 계승하였다. 라이카 M5는 렌즈를 통한 노출측정에 있어 세계 최초의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로서 편리성에서 최고도의 완벽성을 갖고 있었으며 상당히 인상된 가격인데도 대량으로 팔렸다. 흥미있는 신기종은 콤팩트카메라인 라이카 CL인데 그 작은 크기에 M5와 같은 렌즈를 통한 노출측정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즉 카메라 내부에 달린 수광부가 노출 측정시 렌즈 뒤 중앙부위에 위치하고 셔터를 작동시키면 기계내부로 삽입되는 방식이다. 이 CL카메라는 미놀타와의 합작에 의한 첫 결실의 하나로 독일에서 제작된 렌즈로서 라이쯔 명세에 들어가 있다.
   이 카메라들 중 라이카 플렉스 SL2는 발매된 지 3년만인 1976년에 생산이 중지되었는데 지금은 실용적인 측면과 수집적인 측면에서 공히 명성을 얻고 있다. 발매된 이후 라이카 50주년에 마지막을 맞게 된 M5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CL은 생산초기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CL은 웨츨러(Wetzlar)의 카메라 디자인으로 미놀타에서 보다 진보된 제품으로 생산해 인기가 상승되었다. 그러나 이 기종은 미놀타에서 수년간 라이카 M 바이오네트를 쓰는 유사한 카메라를 생산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발매된 지 3년 만에 라이카 계보에서 축출되었다.
   그 당시 4기종 중에서 가장 퇴조되는 것처럼 보였던 라이카 M4는 후속모델인 M4-2나 M4-p에 의해 그 기본 외형이 부활된 기종이며, 지금에 이르러 M6는 28mm에서 135mm에 이르는 초점거리를 위한 뷰파인더 프레임을 내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 그 변함없는 크기에 렌즈를 통한 노출측정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반사식 카메라에 있어 전자가 메커니즘의 제어기능을 떠맡게 되었는데 첫 번째로 1976년 발매된 라이카 R3는 전자식 코달셔터와 중점측광 평균측광 기능을 가졌고 이어 1980년에 발매된 완벽한 전자식인 R4는 중점 또는 평균측광용 조리개 우선식, 셔터우선식, 자동 또는 수동의 5가지 프로그램의 선택과 포커싱 스크린의 교환기능을 가졌고 후기에 발매된 R4-S는 이와 비슷하기는 하나 3가지 프로그램으로 그 기능을 제한하였다.
   그 이후 10년 동안 라이카에 영향을 끼쳐온 모든 사건들은 라이카 회사가 그 유명한 카메라의 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현미경과 기타 기술장비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스위스 회사인 윌드(Wild)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라이쯔의 경영권을 장악했다. 잇따른 사건들이 계속된 그 시기는 사진계통 전체가 위기에 봉착한 것 같은 시기였다. 단지 행운이랄 수 있는 것은 전자카메라라는 새로운 집단의 자생노력으로 열정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1974년에는 더 좋은 경영조건을 모색하기 위하여 라이쯔는 포르토(Porto) 근처의 작은 포르투칼 마을인 빌라노바 드 파마리카오(Vilanova de Famalicao)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현대식 공장에서 트라노비드(Tranvoid) 쌍안경과 영사기렌즈, 여러 가지 타입의 현미경까지 생산했고 라이카 R4와 R4-S를 조립하였다. 이 새로운 공장은 웨츨러의 기존 공장과 미드랜드에 있는 캐나다공장을 바람직한 형태로 통합하였다.
   일본 미놀타사와의 합작협정은 우리가 라이카 CL에서 본 바와 같이 70년대 초반에는 잘 이루어졌다. 이는 라이쯔로 하여금 새세대 반사식카메라를 위한 미놀타의 기술에 접근하도록 하고 그 반면에 라이쯔는 월등한 기계 디자인과 그 렌즈 고유의 품질에 그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볼 때 라이카가 개발한 두 종류의 시스템은 확실히 사진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라이쯔의 계획은 새로운 렌즈들을 계속 생산해내고 그 산업에서 가능한 최고의 진보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진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라이카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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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라이카맨 오스카 바르낙 
오스카 바르낙(Oskar Barnack)이라는 한시대의 장인과 라이카라고 명명될 카메라를 그가 어떻게 발명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라이카 사진의 거장인 테오 키젤바하(Theo Kisselbach)가 ‘라이카 책(The Leica Book)이라는 저서에서 언급한 바 있다. 바르낙은 1879년 브란덴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나 독일 광학산업의 또 하나의 심장부인 예나에서 근무하였고 1891년 웨츨러에 있는 라이쯔사에 들어왔다.
   웨츨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40마일 북쪽에 위치한 인구 5만 2천의 작고 쾌적한 마을로 란(Lalin)강이 중세기 마을과 현대도시를 가로질러 흐른다. 언덕과 나무들은 휴일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이루고 있고 콘 마크르(Korn Markt)에 있는 집의 장식판에는 ‘괴테가 머물렀다’는 자랑스런 문구가 걸려있다. 따라서 라이쯔 왕조와 공장의 창설자는 구태여 언급하자면, 루덜스돌프(Rudersdorf), 엥겔버트(Eugelbert), 켈르너(Kellner)와 벨트(Belthe)가문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쯔사의 연륜은 18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낙은 라이쯔사에서 영화카메라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고, 당연히 거대한 뷰 카메라를 옮기는 고생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영화용 필름이 스틸 사진용으로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는 영화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카메라를 만들었고 그 결과 꽤 큰 확대가 가능한 고품질의 네거티브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라이쯔의 명구(名句)‘작은 네거티브 큰 인화’의 연원이 된다.
   훗날 UR - 라이카로 알려진 프로토타입 카메라는 1913년 바르낙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사실은 정확히 두 대를 만들어 그 한대는 바르낙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한대는 언스트 라이쯔 2세 (Ernst LeitzⅡ)가 사용하였다. 그러나 바르낙이 그 카메라를 1914년 봄 미국여행시 사용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를 최초의 라이카맨으로 칭하는데 있어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 작은 카메라는 발전의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을 얻기 위해 농부와 사진을 교환해야 했던 그 지겨웠던 시절, 바르낙은 그 초기디자인의 결점을 점검했고 필요한 개량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라이카의 처음 이름은 레카
  
   종전 후 카메라는 라이쯔사에서 상품성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31대의 시제품에 여러가지 개선이 행해졌다. 기타 개선점들은 생산제품 모델의 디자인에 첨가될 수 있도록 확실히 해두었다. 상품명에 대한 논의를 거듭한 결과 라이쯔 카메라(Leitz Camera)의 머리글자를 딴 Lei와 Ca를 합성시켜 그 명칭을 결정하였고 초기에는 I를 생략한 채 레카(Leca)로 명명하여 광고를 내보내기에 이른다.
   물론 가장 중요한 논의의 초점은 그 카메라를 과연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결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언스트 라이쯔 3세는 라이쯔사의 이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던 그 시기를 ‘가장 길었던 날들’이라고 회상한다. 카메라를 생산해야 한다는 측과 반대의견을 가진측의 의견은 평행선을 그어나갔다. 카메라 생산을 반대하는 측의 의견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진유리건판을 대량 비축해 두었던 당시 사진기자재 판매상들의 이해를 반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그 당시에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고 있었다. 값싼 35mm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는 35mm필름의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해 낸 반면 전통적인 기자재 생산이익을 감소시켰다. 과거 라이쯔 공장건물의 벽에는 1924년 바르낙의 라이카 생산 결정이 이곳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공식적인 생산시기는 192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그 해 봄 라이프찌히 박람회에 그 카메라가 공식적으로 대중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며 실제는 1924년에 생산되었고 그 해 겨울 몇 대의 카메라가 발주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라이카는 그 출발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비싼 가격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재고는 없었으며 품질은 최상이었다. 상당한 준비와 독일인 특유의 철저성으로 조심스럽게 생산이 전개되었다. 1924년부터 25년까지 870대의 카메라가 제작되었고 일련번호가 1천대에 도달했다. (첫 생산된 31대는 시제품으로 별도 분류되고 100대 이하의 번호는 사용되지 않았음) 공식적인 명칭이었지만 LEICA란 명칭은 레인지파인더가 내장된 라이카Ⅱ가 나오기까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다. 단지 각 카메라에는 Ernst Leitz와 D.R.P(Deutche Reichs Patent : 독일의장등록)란 문자 그리고 일련번호가 음각되었다. 번호는 내부 부속품에도 부분적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로써 훗날 어떤 주요부분이 개량되었는지 점검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1926년 생산을 배가하여 1천 645대의 카메라를 제작하였고 대부분 포칼플레인 셔터를 사용한 반면 200여대는 콤파셔터를 채택하였다. 1927년에 이르러 또 한번 생산을 늘려 3천대를 돌파하게 되고 1928년에도 여전히 비약적인 도약을 계속하여 한해 7천대 이상을 제작했다. 1929년에는 적당한 규모로 제작량을 늘려가다가 1930년에 이르러 3만 8천대 이상을 제작하면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1931년도는 모델을 변경한 해로 불황까지 겹쳐서 그 결과 생산량이 1만 1천대에 그치게 되나 1932년 카메라 제작이 전반적으로 재개되면서 매년 평균 3만대에서 3만 5천대의 라이카가 제작되었다.
   라이카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향후 모든 개발의 핵심이랄 수 있는 디자인에서 2가지 개념의 도입이었다. 첫 번째는 1930년에 도입된 렌즈 교환방식이다. (초기에는 카메라에 새겨진 일련번호의 첫 3자리 숫자를 렌즈에 음각시킨 형태로 특정한 카메라에 특별히 맞춰진 일련의 렌즈군에 교환이 국한되었다.) 두 번째는 모든 렌즈에 자동적으로 연동되는 레인지 파인더를 내장하는 것이었다. 모든 카메라 렌즈가 카메라 몸체 사이에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장착될 수 있도록 플렌지와 필름막사이의 거리가 표준화된 것이 1931년의 일이었고, 그 이후 1932년이 지나서야 그 결합이 효율성을 갖게 되었다. 초기렌즈들도 물론 정확한 등록번호가 확인되고 보정되었으며 레인지 파인더를 부착하게 되었다.

<라이카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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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발전에 기여한 카메라
 
   카메라 시장에 등장한 이후 라이카는 그 탁월한 렌즈 성능으로 사진에의 욕구와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여 영화필름산업이 가진 보통의 수요를 크게 앞질러 35mm 필름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라이카의 초창기를 최적의 필름타입 모색기라고 한다면 그 이후는 필름 제작자들로 하여금 최고의 결과를 위한 라이카용 필름을 제작하도록 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언스트 라이쯔 3세의 기억 속에는 30년대 미국여행 중 이루어진 코닥기술자들과의 소중한 만남이 있다. 그 당시 필름은 코닥크롬 롤 필름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독일로 가져왔고 현상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려보냈으며 현상 후 항공화물을 통해 다시 받았다. 제페린 비행선이 여기에 한 몫을 했다. 좋은 타입의 흑백필름의 모색은 이상한 발견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청년지배인 라이쯔가 이집트에 갔을 때 열대용 포장 속에 싸여진 특별한 유형의 아그파 필름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당시 어떤 이는 항공사진을 위해 페루쯔(Perutz)가 만든 감광유제가 라이카용 필름으로 우수한 것을 발견했다.
 
   아그파는 특별한 흑백필름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 필름은 특별히 제작된 라이쯔 아그파 트라이 컬러 필터(Tri color filter)와 결합하면 컬러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헥토르 73mm(f1.9)와 스마르 F2.0 렌즈의 초대구경이 두꺼운 파상(波狀) 필름에서 기본색을 분리해내는 불투명한 적·청·녹색 필터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이 놀라운 업적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필름은 현상하게 되면 반 포지티브 흑백으로 반전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필터시스템을 통해 영사하면 스크린에 컬러영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아그파의 현상수준은 몇년 동안 코닥크롬을 앞질렀지만 곧 코닥크롬의 성공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라이카와 그 관련 시스템의 모든 발전은 라이카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길을 걸어간 데에서 가능해졌다. 모든 개발은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요소, 즉 “라이카는 두 장의 셔터막인 완벽한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큰 강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60년 동안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는 끊임없이 현재에 이르러 완벽에 근접하고 있다.
   1930년 1월 18일 라이쯔사는 가족회사로 부터G.m.b.H(Gesellshaft mit beschrankter Haftung), 요컨대 미국합작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 후까지 이 명칭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고 단지 여태 사용해오던 D.R.P 대신 D.B.P(for Deutsches Bundesrepublic Patent)가 쓰였다. 동시에 이 표기는 전쟁전후에 생산된 다른 카메라에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9년 이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게 되고 새로운 표기가 사용되었다.
   카메라 모델의 명칭은 또한 당혹스러운 문제를 야기시킨다. 초기에는 두 가지 호칭이 사용되었다. 즉 공식판매 명칭은 라이카Ⅰ였는데 공장 내부에서나 외국에서는 타입A로 통용되었다. 콤파셔터를 내장한 두번 째 모델은 타입B였다. 스크류 렌즈 마운트를 장착한 새로운 모델도 또한 라이카Ⅰ로 불려졌는데 공장내부와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타입C로 알려졌다. 게다가 라이카Ⅱ 레인지 파인더는 타입D로 불려진 반면, 레인지 파인더가 없는 표준형 라이카는 타입E로 알려졌다.
   1933년 라이카 Ⅲ, 또는 타입F가 선을 보였는데 주요한 개선점으로는 카메라 몸체 앞 부분에 1/20초부터 1초 까지의 슬로우 스피드용 꼭지 모양의 노출시간 조절기능이 부착된 것이다. 이 장치를 사용하면 콤파셔터에 비하여 기능면에서 불리한 점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제는 라이쯔사가 초기에 콤파셔터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 콤파셔터는 보통 모델보다 내장하기가 용이하고 가격도 저렴하였다. (1926년도에 라이카가 220 독일연방마르크에 팔린데 비해 콤파는 196독일 연방마르크에 팔렸었다.)
 
세계를 휩쓴 라이카의 명성
 
   1934년 그의 사진업적에 의해 위대한 사진가로, 또한 그 시대의 뛰어난 보도사진가 중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바르낙은 보도사진계를 위한 라이카를 제작하게 된다. 리포토(Reporter) 라는 적절한 명칭이 주어진 그 기종은 대형필름통의 필름 용량이 250매였으므로 후에 ‘250’으로 호칭되었다. 라이쯔사는 이 필름통 내부에서 필름이 되감기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고 일단 노광된 필름은 손쉽게 교환되도록 하는 등 확실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라이쯔사는 카메라 내부에서 필름을 자를 수 있는 특별한 기구를 고안하였다.
   셔터스피드를 1/500초에서 초고속인 1/1000초까지 높이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일이었다. 1935년 발매된 모델 Ⅲa에 고속셔터가 채택되었다. 이 작업은 오스카 바르낙이 그의 생에서 최후로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라이쯔사에서 25년간 봉직을 끝내고 1936년 1월 16일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병약했던 그는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해 나갔으며 현대 기계산업에 있어 최고의 본보기로 그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라이카의 성공사례는 계속 이어진다. 라이카는 모든 나라와 전 대륙을 휩쓴 그 명성의 토대 위에 4가지 기본 모델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4가지 기본 모델은 타입 Ⅰ로 알려진 스탠다드형, 타입 Ⅱ, 타입 Ⅲ 그리고 타입 Ⅲa이며 여기에 매년 수백대 남짓 생산된 ‘리포터’ 타입이 추가되었다. 렌즈도 전통적인 엘마 f3.5 50mm 렌즈에서 35mm 광각 그리고 표준렌즈로부터 73mm, 90mm, 105mm, 135mm, 200mm를 망라한 망원계통의 렌즈로 그 폭을 늘려나갔다.
   1938년에는 1937년에 개발되었던 Ⅲc가 선보이게 되었는데 이 기종은 사소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Ⅲa와 비슷한 기종으로 뷰파인더와 레인지 파인더가 접안부위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0년에는 발매 중지된 Ⅲc에서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의 모델과 비슷한 형태의 그 기종은 주물로 몸체를 만드는 다이캐스팅 방식으로 제작되어 내구성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다소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그 외형이 약간 길어졌는데 여기에 셀프타이머(delayed action Timer)도 내장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Ⅲck’(쿠겔라거 또는 볼베어링 장착구조)나 ‘오토드라이브 250’ 같은 특수한 유형의 개발을 계속해 나갔다. 전후에는 복구를 위한 엄청난 사업으로서 또한 급증하는 라이카 카메라에 대한 수요의 충족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여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따라서 Ⅲc가 전후 발매된 유일한 기종은 아니며 다소 단순한 모델인 Ⅰc나 Ⅱc도 첨가되었다.
   그러나 다소 구형인 Ⅲ, Ⅲa, 그리고 Ⅲb도 그 할당된 수량이 다할 때까지 변함없이 생산되었다. 또한 구형제품에는 새로운 기능을 보완시켜 주었다. 예를 들면 레인지 파인더를 초기 ‘타입 Ⅰ’에 부착시켜 주었고, ‘타입 Ⅱ’, ‘타입 Ⅲ’에 플래시 연동기능을 첨가시켜 주었다. 구형 모델에 대한 이같은 노력은 라이카의 명성을 드높혀 존경의 대상이 되게 했으며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길 원치 않는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완은 일련번호에 있어서 혼란을 유발시켰다. 즉 ‘타입 Ⅰ’ 라이카는 보정시 ‘타입 Ⅱ’로 바뀌어졌다. 이때는 원래의 번호를 레인지 파인더의 덮개에 새겼다. 그러나 이 작업이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 새로운 일련번호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원래 번호나열방식과 같은 5자리 숫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번호 부여는 전쟁 후 즉시 재개되었는데 내부구조를 완전히 개조한 기종에도 실행하였다.
   1차대전 이후 부터 1949년까지 전 생산 95%가 미국시장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기 이후에는 생산품이 세계시장으로 보내어졌다. 한편 라이쯔사는 그들이 가장 중요한 미국시장에 밀착하기 위하여 1952년 캐나다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는 급진전을 맞게 된다.

<라이카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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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발음상 ‘Ⅲe’라는 기종 이름을 채택치 않아
 
   1950년도에는 중요한 기능을 갖춘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플래시 동조 기능이 내장된 Ⅲf였다. Ⅲf이전에는 플래시가 스피드 다이얼 위나 특수한 바닥판에서 외부로 연결되어 작동되었다. Ⅲd(이는 실제로 Ⅲc에 셀프타이머가 부착된 형태임)와 Ⅲf사이에 Ⅲe가 빠져있는데 이는 ‘Ⅲ’의 독일발음이 뒤로 오는 ‘e’와 구별이 안되기 때문에 Ⅲe를 기종명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Ⅲg는 스크류마운트를 채택한 라이카의 마지막 기종이다. 그러나 이 기종은 다른 스크류 마운트 카메라와 달리 50mm와 90mm용 플레임이 있는 밝은 선의 파인더를 가지고 있다. 오늘에 와서 Ⅲg는 최후의 스크류마운트 카메라로서 수집가의 호평을 받고 있다. 스크류 마운트 카메라는 1960년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라이카 30년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1954년 베일을 벗고 출현한 라이카 M3였다. 이 카메라는 종래의 카메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종으로 바이오네트 렌즈 마운트에 교환렌즈에 따라 플레임이 변하는 아주 밝은 뷰파인더를 내장하고 있다. 또한 별도로 제작된 노출계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하여 반자동기능을 부여하였다. 이 카메라는 프로사진가들과 렌즈교환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스크류 마운트 방식의 카메라에 염증을 느낀 고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라이카 M3 발매로 또 다른 라이카 30년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5년 오랜 숙원이었던 SLR카메라 라이카 플렉스가 발매되었다. 예상한 바와 같이 철저하고 충분한 작업을 통해 스탠다드로 평가받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 기종도 라이쯔의 전통에 의해 제작되었고 후속모델로 라이카 플렉스 SLR과 SL2가 생산되었다.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와 반사식 카메라는 모터 드라이브, 정밀한 거리계, 다양한 렌즈군을 망라한 액세서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게다가 그 두 시스템이 별개의 시스템으로 여전히 양립되고 있고 특히 렌즈들은 다른 기종과 같이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이 다른 어떤 시스템들도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다.
   M시리즈를 발매하면서 라이쯔는 반사식 포커싱과 프레이밍을 쉽게 하도록, 특히 망원렌즈나 접사를 위한 비조 플렉스 시스템을 충분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비조 플렉스는 현재 생산 중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할 때 그 기구의 최대 단점이 렌즈를 통한 노출방식이 내장된 M6의 출현으로 극복되었다.
   반사식 카메라와 뷰 파인더식 카메라 중에서 어떤 기종이 더 좋은 기종인가 하는 오랜 논쟁은 지난 10여 년간 양자가 공히 만족스러운 기종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다. 각 기종은 현대사진에 있어 제각기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라이카 M형은 견고하면서 상당히 가볍고 21mm에서 135mm에 이르는 초점거리를 갖춘 밝은 렌즈로 특히 빛이 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속사와 정확한 포커싱이 용이한 기종이다. 보도사진에 있어 그 조용한 셔터소리는 이상적이다. 사용범위가 광범위한 라이카 R형은 아마추어들의 일반사진에서부터 정밀을 요하는 과학 사진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종이다. 반사스크린은 프레이밍을 쉽게하여 별도의 뷰파인더나 접사용 포커싱 기구 사용의 필요성을 배제하고 있다.
 
사진의 수준을 높여준 라이카
 
   아마추어에서 프로사진가에 이르기까지 라이카 카메라가 사진의 수준을 확연히 높여왔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어떤 다른 카메라와도 그 업적은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의 카메라들은 어떤 기본 틀 위에서 조금씩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라이카는 사진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낸 것이다. 아마추어에게는 예의 그 작은 필름이 감겨있는 한, 자동적인 셔터를 누르는 아주 적은 노력으로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도록 편리함을 제공했고 프로사진가들에게는 라이카의 작은 크기가 주는 엄청난 이점 외에 단 한 롤의 필름으로 많은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촬영의 기동성을 부여했다. 그 작은 크기는 중·대형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밝고 초점거리가 긴 렌즈들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라이카나 아니면 1913년에 바르낙이 최초로 프로토타입 카메라에 도입했던 35mm필름을 사용하는 다른 유사한 카메라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보도사진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카가 35mm필름을 사용한 최초의 스틸카메라라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유일한 최고 성공작이었다. 어떤 사람도 라이카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60년 동안 사진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이카가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카메라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일종의 첫 번째 ‘사진시스템’이었다는 사실도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사진촬영에서 시작하여 확대나 영사기능을 망라한 기자재들도 라이카에서 공급되었고, 무엇보다 한결같이 일관성 있게 놓은 수준의 생산품들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던 것이다.
   수년간에 걸쳐 라이쯔에서 발명되고 생산된 방대한 양의 액세서리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사람들은 단지 목록을 열람함으로써 오늘날 35mm카메라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액세서리들이 라이카를 위하여 라이쯔사에서 제작되고 라이쯔사에 의해 실험단계를 거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식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가 출현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은 라이카의 렌즈를 교환할 수 있었고 카메라 내장 레인지 파인더로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초망원 렌즈로 달을 찍을 수 있었고 투시장비를 사용하여 인체의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으며 시계 작동장치를 찍고, 연속촬영을 하고, 입체사진을 위한 기구를 부착할 수 있었다. 오늘날 카메라 시장에는 성능이 썩 뛰어나고 용도가 다양한 카메라 기구들이 많이 나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30년 또는 40년 전에 라이카를 통하여 이같은 업적들이 전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라이카는 한 사람의 천재성과 또 한 사람의 지혜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오스카 바르낙은 기계를 완벽하게 만들어 내었고 언스트 라이쯔 2세는 계산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를 생산하였다. 두 사람 다 라이카 카메라의 성공에 있어 비슷한 무게로 공헌하였다.
   지금, 라이카의 3세대에 이르러 언스트 라이쯔 3세는 애석하게도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고 데오키젤바하(Theo Kisselbach)의 우정어린 충고 또한 들을 길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추억은 오스카 바르낙과 더불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이며 우리가 라이카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위대한 업적을 가져온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게 될 것이다.

<라이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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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9년 수학자 칼 케르너는 독일의 웨츨러의 광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의 사후에 언스트 라이쯔가 이를 인수하였고 1913년, 그곳에서 오스카 바르낙의 최초의 라이카를 제작하였다. 1923년 전쟁은 끝났다.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나이가 뮌헨의 목로주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1925년, 알카포네는 시카고의 맨션호텔에서 리셉션을 열었고 마피아를 조직하였다. 기구를 타고 이문젠이 북극상공을 비행하였다. 그 해에 콤파라이카가 탄생한다. …
 
   라이쯔사가 라이카 카메라 발매 50주년을 자축하면서 세계의 라이카 에호가들에게 보낸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메세지는 이렇게 전개된다. 라이카 카메라의 역사를 일종의 신화로 만들어 왔던 그들은 격동하는 역사의 물결 속에 존재하였고, 그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라이카의 모습을 역사적인 사건과 더불어 반추하고 있다.
   사뭇 감동적인 문구로 포장된 라이쯔사의 선전문구는 접어두고서라도 라이카는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중요한 주로 자리하고 있고 사진사 속에 그 영롱한 빛을 더하고 있다. 결코 현란하지 않은 오히려 소박하고 질박한 그 외형 속에 깃든 독일의 장인정신이 카메라 메카니즘의 완벽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이와 더불어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당대의 거장들은 이 라이카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생한 목소리를 전세계에 던져주었던 것이다. 라이카의 신화는 만든이의 성실과 사용하는 사람의 정열로 만들어졌다.
 

Ur 카메라와 시제품(試製品) 
   소형 카메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Ur카메라는 1913년에서 1914년 사이에 오스카 바르낙에 의해 2대가 제작되었다. 일설에는 3대가 제작되었다고도 하며, Ur이라는 이름은 쉬라는 뜻의 독일어 ‘Urbild’에서 따온 말이다. 그 중 한대를 오스카 바르낙이 직접 사용하였는데 라이쯔사가 1914년 특허출원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카메라가 간단하고 작은 카메라의 실현을 위한 실험적 성격 외에 상업적 계산도 여무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Ur카메라의 몸체는 완전히 금속으로 만들어졌는데 끼워넣도록 만들어진 렌즈 마운트 구조로 인해 그 크기에 있어 당대에서는 파격적인 소형화가 가능해졌다.카메라 기능제어장치가 몸체 윗 부분에 배치되어 오늘날 35mm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의 전형을 예고하고 있으며 손으로 다루기에 알맞도록 그 모양과 크기가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볼 때, 이 카메라는 인간공학에 충실히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카메라를 사용하기에는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즉 필름은 암실에서 장진시켜야 했고 필름을 감을 때 셔터막에 틈이 생겨 빛이 스며들기 때문에 렌즈 한쪽 끝에 고정된 뚜껑을 씌워두어야 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 라이카는 35mm필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장래 카메라 메카니즘의 찬란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었다.
   셔터막은 스프링에 의해 작동되고 노출시간은 그 스프링의 탄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스프링의 탄력은 뷰파인더를 부착하도록 만들어진 액세서리 슈 옆에 돌출된 와인더(winder)에 의해 조절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1/25초에서 1/40초 사이의 노출시간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노출시간을 설정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사용렌즈는 오스카 바르낙이 무척 고심하였던 부분이었다. 필름에 맺히는 화상의 크기가 영화의 2배였기 때문에 영화촬영용 렌즈는 적절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첫번째 카메라의 렌즈로 키노타사(Kino Tessar)가 당연히 선택되었다.
   렌즈는 조립식 마운트에 조정되어 있었고 나선형 포커싱을 채택하였는데 조리개는 렌즈 마운트 가장자리에 부착된 플랜지 뒤에 돌출된 작은 레버를 사용하여 설정할 수 있었다.
   오스카 바르낙은 이 카메라를 사용하여 그 주변의 일상생활을 사진에 담아나갔다. 최초의 라이카맨으로서 그는 이때 그 카메라가 지닌 합계를 느꼈고, 셔터기능, 뷰파인더, 렌즈뚜껑 등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철저히 개선해나가게 된다. 그 이후 개량된 시제품의 종류는 31종에 이르며 프로토타입(proto type) 또는 눌세리(Null serie 또는, Zero series: 모델 0) 등의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는 기종이 이에 속한다. 숱한 시행착오 속에 축적된 이 시기의 다양한 경험은 향후 라이카 성공의 발판이 된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 시대의 개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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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살이 되던 해인 1931년에 나는 아프리카로 갔다……

 아프리카에서 흑수열(黑水熱)을 앓았던 나는 그 무렵 건강이 다시 회복된 것에 감사했다. 나는 마르세이유에 갔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수당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 바로 그때 나는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눈의 연장(延長)이 되어 그것을 발견한 뒤로는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즉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의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숨막히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의 진수 모두를 단 한 장의 사진 테두리 속에 잡아둘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매그넘(MAGNUM)의 창시자이며 금세기 최고의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1908~)의 유일한 저서 ‘결정적인 순간’서문의 한 구절이다. 브레송은 이 글에서 라이카와의 만남을 그의 예술세계에 있어 대단한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라이카 카메라 파인더는 세계를 향한 창(窓)이었고 그는 그 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세계의 역사적 의미를 쉴새없이 사진에 담아나갔던 것이다.
 이 조그만 카메라는 한 시대, 그토록 위대했던 사진가들의 손 안에서 격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렌즈 교환식 라이카Ⅰ‘모델C’

 스크류 마운트 타입으로 렌즈교환이 가능한 최초의 라이카는 1931년에 발매된 라이카 Ⅰ이며 C타입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 개선된 새로운 기종들에 추월당하여 짧은 기간동안 발매된 이 기종은 1mm☓39mm 핏치의 나사로 이루어진 렌즈마운트의 플랜지가 그 특징이다. 
 이 기종에서 광각계통의 렌즈로는 초점거리 35mm f3.5 엘마(Elmar)가 사용되었고, 망원 계통으로는 135mm f4.5 엘마 표준렌즈로 50mm f2.5 헥토르(Hektor)가 사용되었고 1931년 90mm f4의 엘마가 새롭게 추가된다.
 이 새로운 카메라에서 렌즈교환은 카메라에 새겨진 일련번호의 마지막 세자리 숫자가 음각된 일련의 렌즈군에 국한되었다. 렌즈교환이 가능한 일단의 카메라는 일련번호 37280으로부터 생산이 시작되었으나 실제로는 일련번호 55404를 넘기면서 정식 생산에 돌입되었다. 일련번호 60500까지는 렌즈고정식 카메라와 생산이 병행되었다.
 일련번호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렌즈교환은 플랜지와 필름막 사이의 거리가 28.8mm로 표준화된 이후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기존 기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 시기에 나온 카메라 렌즈 마운트의 플랜지 중앙 상단부에 ‘O’마크를 새겼고, 이 마크는 그 이후에 나온 다른 기종들에서도 발견된다. 라이쯔사는 그 이전에 생산된 렌즈와 카메라를 똑같은 방식으로 개조해주었다. 일련번호 60001부터 시작된 이 기종의 생산은 1931년말 일련번호 71199로 막을 내린다.
 렌즈 고정식 카메라에서는 하키스틱(Hockey Stick)이라는 애칭을 가진 스프링이 장치되어 있었고 이 부품은 초점거리 무한대에서 렌즈를 고정시키는 기능을 하였는데 이 모델의 등장과 더불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렌즈 마운트에서의 약간의 변형과 하키스틱의 제거외에 외형상으로 이 모델과 렌즈고정식은 거의 흡사하다. 릴리즈 버튼은 1만7천대 생산 이후 사용된 전형적인 형태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50mm 표준렌즈용  뷰파인더 위에 135mm 화각을 위한 마스크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라이쯔사에서는 새로운 기종이 생산될 때마다 구기종에 새로운 기종의 기능을 첨가시켜 주었으므로 그 초기 형태의 카메라가 과연 몇 대나 현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추측에만 의존될 뿐이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 시대의 개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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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Ⅱ ‘모델D'
 1932년 초 라이쯔사는 35mm 카메라의 새로운 전형으로 볼 수 있는 모델을 선보이게 된다. 이 35mm 카메라는 35mm에서 135mm에 이르는 다양한 렌즈군을 구비하고 있고 거리연동이 되는 레인지파인더를 내장하고 있다. 오늘날 카메라의 대중화에 라이쯔사가 끼친 위대한 업적과 더불어, 이 카메라 레인지파인더 제작과정에서 보여준 그 정확성은 향후 모든 카메라가 추구해야 할 기계적 정확성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롤러로 작동되는 이 레인지파인더는 단순한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 정밀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라이카Ⅱ는 1932년2월1일 일련번호 71200으로 생산이 시작되어 그 해에 일련번호 101000까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일련번호대의 카메라가 1932년 11개월 동안 전부 생산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어 1933년 생산된 소량의 카메라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라이카 Ⅱ의 특징은 당연히 레인지파인더에 있다. 따라서 카메라 몸체 윗부분이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의 효과적 배치를 위하여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고 이 윗부분에 기타 주요한 기능장치가 배치되었다. 몸체 윗부분의 뒷면에는 뷰파인더와 레인지파인더용 접안렌즈가 나란히 배열되었다.
 이 모델의 등장과 더불어 라이카 카메라는 7종의 렌즈를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스템 카메라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된다. 표준렌즈는 50mm F3.5 엘마, 광각계열의 35mm F3.5 엘마, 망원계열의 73mm F1.9 헥토르, 90mm F4 엘마, 105mm F6.3 엘마 그리고 135mm F4.5 엘마가 이 카메라의 교환렌즈로 사용되었고 이어 50mm F2.0 스마르(Summar)가 추가되었다.
 라이카 Ⅱ는 매우 오랜 기간동안 생산된 장수(長壽)기종으로 공식적인 생산은 1940년대 까지 계속되었고 1948년에 발매된 일련번호 358650이 그 최후의 카메라로 기록되고 있다. 1933년 일련번호 111551로 시작된 크롬 몸체의 생산과 몇대 안되는 생산대수를 기록하고 1947년 일련번호 352900으로 마감했던 검은색 몸체의 등장은 라이카 사(史)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카메라 내부의 기능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셔터 스피드의 범위는 라이카 Ⅰ과 마찬가지로 1/20, 1/30, 1/40, 1/60, 1/100, 1/200, 1/500초 였는데 라이쯔사는 이 카메라 전면에 저속셔터용 다이얼을 부착시켜 Ⅲ나 Ⅲa 기종으로 개조해 주기도 했다.
 
라이카 스탠다드 ‘모델E'
 라이카 Ⅱ와 더불어 1932년에 새로운 기종인 라이카 스탠다드(Standard)가 등장한다. 외형은 라이카 Ⅰ(모델C)과 비슷한데 라이카 Ⅱ에서 사용된 필름되감기 노브(Knob)를 부착시켜 실용성을 높였다. 이 새로운 모델은 공식적으로 1932년 10월에 소개되었는데 그 첫 모델의 몸체는 검은색 에나멜로 도장되어 있었다. 이 카메라는 일련번호 101001에서부터 시작하여 1932년 한해만 해도 5천대가 제작된다. 이 카메라의 전형적인 모델인 크롬몸체는 1933년 이후 일련번호 114001부터 제작이 시작되었다.
 라이쯔사에서 생산된 카메라 중에서 가장 단순한 기종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카메라는 간단한 형태의 뷰파인더가 부착되었으며 셔터 스피드의 범위는 1/20초에서 시작하여 1/30, 1/40, 1/60, 1/100, 1/200, 1/500에 이르고 B셔터 기능의 'Z'셔터가 추가되었다. 이 기종의 생산도중에 라이쯔사는 카메라 몸체 양 옆 부분에 카메라 끈을 걸기 위한 고리를 최초로 부착하게 된다.


라이카Ⅲ ‘모델F'
 라이카 Ⅱ가 첫선을 보인지 1년만에 1초부터 1/500초까지 망라한 충분한 셔터스피드를 갖춘 새로운 기종인 라이카 Ⅲ가 발매되었다. 이 기종에서는 몸체 윗부분에 장착된 셔터스피트 다이얼과 별도로 1초, 1/2, 1/4, 1/8, 1/20초에 이르는 저속셔터와 ‘Z’셔터작동을 위한 저속셔터 다이얼이 몸체 전면에 부착되었다. 이 저속셔터 다이얼의 부착으로 라이카 카메라는 명실공히 셔터기능면에서 콤파셔터를 쓰는 카메라를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5배율의 밝은 레인지파인더가 채택되어 장초점렌즈의 포커싱이 훨씬 용이해졌고 시도보정장치가 장착된 접안렌즈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라이카 Ⅲ는 1939년 일련번호 343100을 마지막으로 그 생산이 중지된다.


 
라이카 250 ‘모델 FF와 GG’
 1933년 라이쯔사는 빅라이카(Big Leica) 또는 리포터(Reporter)로 명명된 라이카 250을 발매하게 된다. 이 카메라는 라이카 Ⅲ를 모델로 하여 개발되었기 때문에 라이쯔사에서는 라이카 Ⅲ의 모델명인 ‘F'를 따서 'FF'로 명명하였다.
 필름 10m를 장착할 수 있는 필름통을 부착하여 250매까지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기종은 포토 저널리스트들의 호응을 받았다.
 라이카 Ⅲa가 등장하면서 새롭게 선보인 1/1000초의 고속셔터 스피드가 이 모델에 추가되면서 그 명칭은 Ⅲa의 ‘G'를 따서 ’GG‘로 바뀌게 된다.
 이 빅카메라는 1934년 60년대의 제작을 필두로 1935년, 1936년 각각 70대, 그 이후 매년 100대 가량 제작되었으며 두 대의 시제품을 포함한 총제작대수는 952대였다. 이 기종은 1943년 일련번호 353800으로 그 생산을 마감한다.
 
라이카 Ⅲa ‘모델G'
 1/1000초에 이르는 초고속셔터스피드의 채택은 라이카 카메라의 발전사(發展史)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이다. 이 새로운 카메라는 스포츠 사진가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는데 당시 독일에서 유명한 자동차 경주를 촬영하는데 적격이었다. 이 기종은 모델G로 명명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1938년에 생산된 라이카 Ⅲb도 모델 G로 명명되었다는 사실이다. 라이쯔사는 이를 끝으로 모델명칭에 알파벳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이 기종의 생산초기에 라이쯔사는 기존의 라이카 Ⅲ와 비슷한 제작대수로 균형을 맞추어 제작하다가 해를 더하면서 라이카 Ⅲa의 생산비율을 높여가게 되는데 1939년까지 총 제작대수를 볼 때 라이카Ⅱ거 5만3천대, 라이카 스텐다드 2만7천대, 라이카Ⅲ 8만대에 비하여 라이카 Ⅲa는 9만1천대가 생산된다.
 라이카 Ⅲa의 주요재원은 다음과 같다. 몸체전면의 저속셔터 다이얼에 의해 작동되는 셔터스피드는 T셔터 1초, 1/2, 1/4, 1/8, 1/20초이고 몸체 윗부분 셔터스피드는 1/20, 1/40, 1/60, 1/100, 1/200, 1/500, 1/1000초와 ‘Z'셔터로 설정되어 있다.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의 접안렌즈는 라이카 Ⅲ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라이카 Ⅲf가 발매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이르러 웨츨러의 라이쯔사는 초기라이카를 검은색 몸체에 플래쉬가 연동되는 Ⅲf 기종으로 개조하는 서비스를 실시한다. 따라서 초기라이카 소장가들은 한결 고급스러워지고 신품과 거의 다름없는 카메라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몸체 윗부분의 덮개와 셔터 다이얼이 신형으로 교체되었고 카메라 끈을 걸기 위한 고리도 새로 부착되었다. 1935년 일련번호 156201로 생산이 시작된 라이카 Ⅲa는 제2차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꾸준히 생산되었고 1950년 일련번호 357200으로 그 생산이 중단되었다.
 ‘Monté en Sarre'라는 독특한 음각문자로 라이카 애호가들의 시선을 끄는 독특한 기종이있다. 전후 1949년에서 1951년 사이에 500여대의 라이카 Ⅲa가 프랑스 점령지역인 자르(saar) 지방의 성 잉거베르트(St. Ingbert)에 있는 사롭티코(Saroptico)광학회사에서 조립되는데 이때 조립된 카메라에 이 문자가 새겨진 것이다. 이 카메라들은 모두 프랑스와 프랑스 식민지 국가에서 판매되었고 일련번호는 359000에서 359504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종 생산 후기에 제작된 기종의 와인더 노브에는 Ⅲf에서나 볼 수 있는 필름 감도 표시계가 발견되기도 한다.
 
라이카 Ⅲb
 라이카 Ⅲb는 그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라이카 Ⅲa와 1940년 발매된 다이케스팅 방식의 최초기종인 라이카Ⅲc 사이에서 중간모델정도로 평가되는 기종이다. 이 기종의 전체적인 외형은 실제로 Ⅲa와 거의 흡사한데다 그 주요기능도 Ⅲa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만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의 접안렌즈들이 나란히 밀착된 최초의 기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접안렌즈들이 밀착되어 포커싱과 플레이밍이 매우 신속하고 편리해진 것이다.
 설계상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시도(視度)보정장치가 필름 되감기 노브 아래 위치하게 되고 레인지파인더 포커싱 시스템 자체에도 변화가 수반된다. 기존의 라이카 Ⅲ나 Ⅲa 기종의 몸체 높이가 67mm인데 비하여 개조된 레인지파인더는 덮개가 조금 높기 때문에 그 높이는 1mm 높아진 68mm였다. 액세서리 슈에서도 다소간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고정나사의 수가 3개에서 4개로 1개 늘었고 양 옆 안쪽으로 뷰파인더나 플래쉬 등을 압착시키기 위한 레일이 부착되었다.
 이 기종은 크롬으로 도금되었으며 1937년 일련번호 240001의 첫 제품이 나온 이후 2년 동안 매년 1만대가 제작되었다. 실질적인 생산은 1946년도까지 이어지는데 그 생산량은 초기에 비해 크게 감소되어 1940년부터 1946년 사이 총 제작대수는 1만 8백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약 3만대가 제작되었고 마지막 기종의 일련번호는 355000이다.
 
 라이카 72
 1950년대 초반 웨츨러의 라이쯔사는 기록보관용이나 과학적 용도로 적합한 소위 하프사이즈 프레임인 18☓24mm판 카메라의 개발에 비상한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포켓 카메라는 정식 생산에는 이르지 못한 채 단지 시제품의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여기서 기술하려고 하는 라이카 72는 라이카 Ⅲa의 메카니즘에 촬영 카운트 표시를 75매까지 늘린 단순한 변형을 말하며 기존 Ⅲa의 촬영 카운터 표시에 35매 이상의 숫자를 붉은색으로 음각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Ⅲa에 표시된 숫자 5옆에 50, 10옆에 55등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 혼합되어 나열되어 있는 식이다. 뷰파인더에는 조그만 창을 별도로 두어 하프 사이즈 프레임의 화각을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셔터 막에 마스크를 씌워 18☓24mm의 상이 필름막에 맺히도록 하였다.
 이 카메라는 웨츨러에서 소량이 제작된 반면에, ‘Ernst Leitz Canada Limited Midland ontario'가 몸체 윗부분에 음각된 기종이 캐나다의 라이쯔사에서 정식으로 제작되었다. 일련번호 357301로 제작되기 시작한 라이카 72는 라이카 계보상에서 가장 짧은 기간동안 가장 적은 수량이 제작된 대표적 기종으로 기록되고 있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의 전성시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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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카 카메라에 대한 다양한 찬사를 접할 때마다 그 내용이 어딘지 모르게 과장되고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라이카 카메라가 사진을 찍기 위한 하나의 메커니즘이라는 극히 당연한 사실의 범주를 넘어 미신처럼 부풀려온 애호가들의 논리에 적지 않게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카를 사용하는 사람은 두 번 놀라게 되어있다. 한번은 라이카에 의해 만들어진 조그만 35mm 필름이 대형 사이즈 인화지에 프린트되어 나온 결과를 보고 놀라고, 또 한번은 라이카 카메라를 분해할 때 그 치밀한 기계구조에 놀란다”는 한 예찬론자의 말은 어떤 다른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다.
 인화 사이즈를 늘리면 늘릴수록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화상의 선예도(Sharpness)에 감탄했던 경험이 있는 필자는 전자를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인식하고 있고, 기계공학에는 일가견이 없으나, 생산 된지 40년이 지난 그 카메라가 오늘날까지 별 탈 없이 필자의 주 기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후자의 논리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라이카 신화는 위대한 사진가의 불후의 명작 속에서 빛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최초의 포토저널리스트로서 “사진이라는 것은 피사체 그 자체 속에서 생동하고 있는 ‘존재이유’ 그것이 고정된 순간이다”라는 주장을 편 앙드레 케르테츠(Andreﹶ kertész)는 1928년 라이카 사진기를 입수하면서 ‘디스토션 40’등의 명작을 남기게 되고 엮음사진의 효시가 되는 알프레드 아이젠스테트(Alf́red Eisen-staedt)는 철저히 라이카만을 고집하여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나갔다. 너무나 유명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은 일평생 라이카만을 애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고, 로버트 카파(Robert Capa)가 1935년 이후 라이카를 사용하면서 불행한 전쟁의 모습이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또한, 라이카카메라와 몇 개의 필름은 에드 반 데어 앨스켄(ED Van Der Elsken)을 ‘나르시즘’ ‘남아프리카에서’ 등의 대작을 낳은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라이카 Ⅲc
 외형만 놓고 볼 때 이 기종은 Ⅲb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Ⅲb에서 Ⅲc로 넘어오는 과정에 큰 변화가 수반된다.
 1940년에 발매된 라이카 Ⅲc는 기존의 기종에 비해 전혀 새로운 기종이었다. 즉, 작은 부품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생산방식이 다이케스트 방식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생산설비의 전면적인 교체가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월등히 향상된 카메라의 품질과 생산과정의 편리함을 놓고 볼 때 그 투자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방식은 향후 새로운 모델의 출현을 위한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Ⅲc의 레인지 파인더 덮개 부분은 카메라 몸체 윗부분과 한 벌로 주조(鑄造) 되었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으므로 Ⅲb와 쉽게 구별이 되고 있고 또한 이 제작과정의 결과 내구성은 더욱 향상 되었다.
 몸체 길이는 기존의 다른 기종보다 3mm가 더 긴 136mm이고 크롬으로 도금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군대 납품용으로 제작되면서 청회색 칠을 한 Ⅲc가 등장한다. 릴리즈 버튼 주위의 고리는 약간 넓어지면서 구부러진 릴리즈 케이블을 사용할 때 고리를 제거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촬영 카운터는 기존 모델과 비교할 때 그 모양은 비슷하게 생겼으나 맞물린 톱니바퀴를 주전(周轉)시켜 촬영한번에 한 눈금씩 정확히 진행하도록 한 개량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1940년 일련번호 360101로 시작된 생산은 1946년에는 일련번호 397650에 이르렀고 일련번호 400000에서 다시 생산이 시작되어 일련번호 525000에 이르게 된다. 일련번호 397650과 400000 사이에 일련번호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한면은 붉은색이고 또 다른 한면은 검은색인 셔터막이 사용된 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실제사용에 있어서 두장의 셔터막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두장의 셔터막 색깔은 외형상으로는 일치하게 된다. 이 셔터막의 사용은 당시 모든 분야에서 겪어야 했던 심각한 물자부족사태로 인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이미 확보된 재고품을 사용하게 되면서 시작되는데 라이쯔사는 훗날 정상적인 셔터막으로 교체해 주었다. 이 사건은 일련번호 362401부터 379226 사이에 일어났다.
 2차세계대전중에 군사용이라고 음각된 카메라와 회색칠을 한 카메라가 제작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크롬도금이 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모두 군사용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말기 크롬의 품귀 현상으로 말미암아 크롬대신 페인트칠을 한 카메라도 시판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중 수년에 걸친 시제품의 제작을 통해서 Ⅲck 타입의 카메라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쿠겔라러(Kugellaler)또는 볼 베어링 장착카메라라고 불려지는 이 카메라는 주로 나치 공군용으로 사용되었는데 혹한속에서도 셔터막의 부드러운 회전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볼 베어링을 장착하게 된 것이 이 기종의 특징이다. 이 모델이 제작되고 나서 1946년 이후 새로운 유형의 Ⅲc가 등장하게 된다.
 일련번호 400000으로 시작된 전후의 라이카 Ⅲc는 종래의 Ⅲc를 개량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종래의 Ⅲc에서 필름 되감기 레바 아래 있는 도드라진 축받이와 레인지 파인더를 위한 포카싱레바에서 노브가 제거되었고 내부의 메커니즘을 개량하여 셔터막 롤러 굴대에 향후 볼 베어링을 장착하기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셔터 스피드의 배열에 있어 카메라 몸체전면에 부착된 저속셔터에 T셔터, 1/2, 1/4, 1/10, 1/15, 1/20, 1/30초를 설정하였고 1/30초에서 고속셔터로 전환하도록 하여 고속셔터의 효과를 제고하였다. 몸체 윗부분에 설정된 셔터스피드 1/30, 1/40, 1/60, 1/100, 1/200, 1/500, 1/1000과 Z셔터였다. 뷰파인더의 배율은 1/2이었고 그 반면 레인지 파인더는 1.5배로 늘어났다.
 참고로 초기에 F3.5 엘마 렌즈를 장착한 Ⅲc의 코드는 LOOGI 이고 F2 스미타르를 장착하였을 때 LOODU, F1.5 제논 장착시에는 LOOSB이다. 또한 전후 발매된 F1.5 스마리트를 장착한 기종은 LOOIT, 코팅된 엘마를 장착할 경우 LOOPN, 코딩된 스미타르 장착시에는 LOOKX이다. 후기 Ⅲc 기종에는 ‘Ge-rmany'란 단어가 추가로 음각되었다.
 
라이카 Ⅲd
 이 기종은 라이카 Ⅲc에 흔히 셀프타이머로 불리우는 시한 작동장치가 첨가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필름 되감기레바 아래 도드라진 축받이가 있는 초기Ⅲc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Ⅲd에는 두종의 변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한가지는 검은색 셔터막이 내장되고 저속 스피드 다이얼이 없는 형태이고, 또 다른 한 종은 붉은색 셔터막에 저속 스피드 다이얼이 부착된 형태의 모델이다.
 이 기종의 셀프 타이머는 후속모델인 Ⅲf나 Ⅲg와 외관상 흡사한데 타이머로부터 셔터릴리즈 작동에 이르는 메커니즘은 확연히 다르므로 Ⅲf나 Ⅲg와 부품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이카 Ⅲd는 초기 Ⅲc 기종의 생산기간중에 일련번호 360000대에 극소량이 제작되었고 367000대에는 400대 이상이 제작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 시판가격은 카메라 몸체 즉 LOOTP가 1940년도에 255마르크, F3.5 엘마렌즈가 부착된 LOOUC는 332마르크, F2스마르렌즈의 LAQOO는 435마르크 F1.5제논 렌즈의 LOOWD는 587 마르크였다.
 
라이카 Ⅱc
전후 색다른 형태의 라이카 카메라에 대한 강한 요구에 부응하여 제작된 이 기종을 단순히
Ⅲc로부터 저속셔터 기능을 제거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 카메라는 1948년 일련번호 440001로부터 제작에 들어갔고 1951년까지 총 9999대가 제작되었으나 그 이후 일련번호 450001부터 451000까지 1천대가 추가로 제작된다,
크롬도금으로 제작된 이 카메라의 몸체는 전후에 만들어진 Ⅲc와 같은 모양이며 단지 필름되감기 레바 아래 측받이만 그 이전 모델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몸체 전면에 부착된 저속 셔터 다이얼이 사라진 것 외에 Ⅲc와의 또 다른 차이점은 몸체 윗부분의 액세서리 슈에 있는 끼움쇠에 두개의 꽤 큰 나사로 고정된 금속 박편(薄片) 스프링에서 찾아볼수 있다. 또
어떤 기종에는 Ⅲf타입의 플래쉬 연동장치가 부착되기도 했다. 1/30, 1/40, 1/60, 1/100, 1/200, 1/500초와 B셔터가 이 기종의 셔터 스피드로 설정되었고 몸체 윗부분에는 전쟁전에 생산된 카메라에서 쓰인 ‘Le-ica D.R.P' 와 ’Ernst Leitz Wetzlar '가 그대로 음각되었으며 여기에 ‘Germany'가 추가로 음각되었다.
 
라이카 I c
1948년 라이카 스탠다드가 발매 중지됨에 따라 이를 대체하기 위한 기종으로 라이카 Ⅲc의 몸체를 약간 변형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현미경등을 부착하여 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레인지파인더나 뷰파인더는 내장되어 있지 않다. 이 카메라는 1949년부터 1951년 사이에 총 1만1천8백대가 제작되었는데 그 첫 일련번호가 45501이고 마지막 일련번호는 562800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긴 몸체 윗부분에는 두개의 액세서리 슈가 부착되어 있고 필요한 경우 별도로 제작된 뷰파인더와 레인지파인더를 끼워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셔터 스피드는 라이카 Ⅱc와 마찬 가지로 1/30초부터  1/500까지로 국한되었고 몸체 왼쪽 모퉁이에 ‘Leica'가, 또 그 밑에 DRP가 음각되어 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E. LEITZ WETZLAR'와 GERMANY' 그리고 그 밑에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의 전성시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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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Ⅲf
 필자에게 큰 감동을 던져준 사진작가 정범태(1928~)선생은 라이카 Ⅲf에 대해 특별히 애착을 가진 사진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55년, 당시 종로의 한옥 한 채 값에 해당하는 어마 어마한 금액으로 라이카 Ⅲf를 구입하게 되는데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마부’ ‘결정적 순간’등이 그 열악한 촬영조건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카메라로 촬영조건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카메라로 촬영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50년대 60년대를 풍미한 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원로 사진인들이 그들의 추억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카메라로 이 Ⅲf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이 기종의 라이카 스크류 마운트의 전성시대를 구가한 최고의 명기였음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1950년대 발매된 기종은 한마디로 스크류 마운트 라이카의 꽃이었다. 이 기종은 외형상으로는 Ⅲc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여기에 플래쉬 연동장치가 내장되어 있고 필름 종류 지시계가 필름되감기 노브 속에 들어있다. 라이카 Ⅲf는 일련번호  525001로 시작해서 그 첫해에 1만 5천대 이상, 그 이듬해인 1951년 2만5천대, 1951년과 52년사이에 3만대가 추가로 제작되어 총 7만대 이상이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웨츨러의 전형적인 형태로 캐나다에서 제작된 1천대, 즉 일련번호 610000 에서 611000사이의 생산대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소량의 Ⅲf에서 Leitz Canada의 음각문자가 발견되고 있는데 Leitz Canadad의 음각은 1974년 캐나다에서 M4가 제작되고 나서야 비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기종은 그 희소성 때문에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때 발매된 Ⅲf에는 소위 ‘블랙 다이얼’로 통칭되는 장치가 부착되었다. 이 장치는 전기 또는 발브식 등 서로 다양한 종류의 플래쉬 유형을 지시하는 0에서부터 20까지의 검은색 숫자판이 스피드 다이얼 밑에 위치하여 눈금이 있는 링을 움직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장치로, 후에는 연동장치의 다이얼 설정 만으로 모든 셔터 스피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블랙 다이얼’ Ⅲf에는 라이카의 전형적인 셔터 스피드가 설정되었다. 즉 저속스피드 다이얼에 의한 T, 1, 1/2, 1/4, 1/10, 1/15, 1/30초, 몸체 윗부분 스피드 다이얼에 의한 1/30, 1/40, 1/60, 1/100, 1/200, 1/500, 1/1000그리고  B셔터이다.
 1952년 플래쉬 연동 숫자판을 붉은색으로 만든 소위 ‘레드 다이얼’ Ⅲf가 등장한다. 이 기종에는 셔터스피드가 국제표준방식으로 설정 되어있다. 저속 스피드 다이얼에는 T, 1, 1/2, 1/5, 1/10, 1/15, 1/25초가 설정되었고 몸체 윗부분의 다이얼에는 1/25, 1/50, 1/75, 1/100, 1/200, 1/500, 1/1000 초와 B셔터가 설정되었다.
 몸체는 크롬으로 도금되었고 두개의 접안렌즈는 서로 붙어있으며 필름 되감기 노브 아래레인지파인더를 위한 포카싱 레바가 위치한다.
‘블랙 다이얼’에서 ‘레드 다이얼’로 진행해 오는 동안 카메라 윗부분의 음각문悶〉?변화가 수반된다. 즉 ‘Ernst Leitz'와 ’Wetzlar'사이에 ‘GmbH'라는 문자가 삽입되고 제일 밑부분에 ’Germany'가 음각되었다.
 새로운 문자가 새겨진 기종은 일련번호 615001로 시작되는 첫 생산에서 3만5천대, 그 이후는 1만 8천대가 제작되었다. 또한 일련번호 684001부터 685000까지의 1천대는 캐나다 공장에 할당되었고 일련번호 685001부터 699999까지의 기종에는 셀프타이머가 부착되었다. 군사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크롬으로 도금되었는데 군용으로 나온 검은색 라이카에는 셀프타이머가 부착되지 않았고 검은색 엘마50mm가 장착되어있다. 라이카 Ⅲf는 1956년 일련번호 825000으로 그 화려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일로는 ‘Monte'en Saar'란 문자가 음각된 Ⅲf인데 이 기종이 정식으로 제작된 기종인지 아니면 변형인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라이카Ⅱf
1951년 라이카 Ⅲf 생산이후에 만들어진 기종으로 Ⅲf 모델에 저속 스피드 셔터를 제외시킨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액서서리 슈는 두개의 나사에 의해 고정되어 라이카Ⅱc의 형태와 아주 흡사하다. 1951년 일련번호 451001로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그 해 두 차례 걸쳐 9천대가 생산되었으며 그 당시 설정된 셔터 스피드는 B셔터를 포함하여 1/30초에 1/500초까지였다. 그러나 일련번호 611001부터 615000사이에 제작된 기종에는 1/25, 1/50, 1/75, 1/100, 1/200, 1/500초와 B셔터로 다소간 변경설정 된다. 후기모델에서는  Ⅲf'레드다이얼‘과 마찬가지로 1/1000초의 고속스피드가 채택되었고 1956년까지 총 3만4천대가 제작되었다.



 
라이카 Ⅰf
 1951년에 소개되어 1956년 까지 생산된 이 기종은 라이카 Ⅰc의 대체기종으로 볼 수 있다. 라이카Ⅰc와 마찬가지로 뷰파인더와 레인지파인더가 부착되어있지 않으며 단지 몸체 윗부분에 두개의 액세서리 슈가 위치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플래쉬 케이블을 접속시키기 위한 플래쉬 연동 링이 몸체 앞부분에 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라이카 Ⅲf와 똑같은 와인딩 노브를 사용하였고 셔터 스피드도 1/500초까지도 동일하다.
 그러나 발매된 이후 오래지 않아서 셔터스피드 1/25, 1/50, 1/75,∙∙∙등으로 재설정되었다.
1951년 일련번호 562801로 생산이 시작되어 그해 ‘블랙다이얼’ Ⅲf 셔터를 부착한 2천2백대의 카메라가 제작되고 그 이후 ‘레드다이얼’이 부착된 후속모델이 발매된다. 이 기종은 1957년 까지 생산되었다.


 
라이카 Ⅲg
 최후의 스크류마운트 라이카로 라이카의 찬란한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한 기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올드팬들의 가슴에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기종은 사실 라이카의 혁명으로 평가되는 라이카 M3출현 이후에 등장한 기종이다.
 이 기종은 일련번호 825001로 시작하여 1956년 독일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라이카 M3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축적된 고도의 기술이 가미된 이 기종은 기존의 Ⅲf 메커니즘에 비하여 다소간 개선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선 뷰 파인더는 패럴랙스 보정이 되어있고 90mm 렌즈용 프레임이 네 개의 삼각형으로 지시되고 있다. 전면에서 볼 때 보다 커진 뷰파인더 옆에는 작은 창이 있어 프레임을 밝게 하고 있고 레인지파인더의 창은 둥글게 되어있다.

  셔터 스피드는 저속용과 고속용 두개의 다이얼에 의해 설정되는데 그 스피드의 범위는 T, 1, 1/2, 1/4, 1/8, 1/15, 1/30, 1/60, 1/125, 1/250, 1/500, 1/1000초와 B셔터이고 저속셔터의 해제는 몸체앞부분 저속셔터 다이얼을 1/30초에 놓으면 되도록 하였다. 스피드 다이얼에는 두개의 화살표(↯)가 음각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전자플래쉬 연동용으로 1/60초 옆에 위치하고 나머지 붉은 화살표는 저속셔터를 상기시키기 위해 1/30초 옆에 위치한다.
접안렌즈가 있는 카메라 뒷면에는 한 개의 플래쉬 접속코드가 장치되어있다. 레인지 파인더에는+와-로 표기된 시도보정장치가 있으며 액세서리 슈는 네 개의 나사로 고정되어 있다.
액세서리들을 견고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액세서리 슈 레일 위에 스프링을 부착하였다. 카메라 내부구조는 Ⅲf와 비슷하게 되어있으나 어떤 기종에서는 일련번호가 기계 내부의 밑부분에 음각되어 있어서 카메라 밑 뚜껑을 열어서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라이카 Ⅱg
 1956년에 소량 제작되었던 기종으로 저속셔터와 셀프타이머가 제외된 것만 빼면 Ⅲg 와 거의 같은 기종으로 볼 수 있다. 12대에 15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혹자는 이를 시제품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카메라는 바이오네트 타입의 M시리즈에 대한 선호도에 밀려 제대로 생산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라이카 Ⅰg
 1957년 Ⅲg의 출현과 더불어 라이카 Ⅰf를 대체하기 위해 발매하였다. 첫 일련번호는 887001이었고 1960년까지 생산되어 6천3백대가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지막 기종의 일련번호는 987600이다.
 이 카메라는 Ⅲg의 플래쉬 연동 메커니즘을 수용하기 위해서 몸체 윗부분이 필름 되감기 노브까지 모서리가 둥근 평면으로 되어있어 그 이전에 생산된 비슷한 용도의 Ⅰc나 Ⅰf와는 근본적으로 다룬 형태를 띠고 있다. Ⅲg에서와 마찬가지로 네 개의 나사로 고정된 액세서리 슈가 두개 부착되었고 셔터 스피드의 설정도 Ⅲg와 동일하다. 독특한 점은 몸체 전면에 음각된 ‘Leica DBP' 문자인데 이러한 형태의 음각은 이 기종에서만 볼 수 있다.

<라이카, 황금시대의 개막(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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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M3의 출현
 클래식 카메라에 관한 우리나라에 손꼽히는 이론가 이면서 동시에 정열적인 라이카맨이기도 한 이경모 선생은 수년전 한 지면을 통해서 라이카 M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계의 카메라계는 SLR 전성시대이면서도 일부 고집스런 사진가들은 여전히 M형 라이카로 촬영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공통된 생각은 라이카를 쓰면 쓸수록 신체의 일부같이 느껴지면서 자신의 성격이나 버릇마저도 받아들일 줄 아는 충실한 카메라라고 극찬한다.・・・”
 이 내용은 일반 사진가들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되지 않을 다분히 과장된 찬사의 인용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꽤 오랜 기간 라이카 M3를 애용해오고 있는 필자를 포함해서 라이카의 매력에 심취한 경험이 있는 애호가들은 이 예찬론에 적지 않게 공감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편리한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에 비하여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라이카 M형을 사용하는데 있어, 그 사용상의 단점을 극복할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신비스러울 만큼 탁월한 렌즈성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메커니즘에 의해 빼어난 사진을 만들  수 있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카메라 전문가인  丹 壽 산    이 「카메라 리뷰」지에 명기 12종의 인기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1위의 영광은 ‘라이카 M3’와 ‘Ⅲg’가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기타 순위를 알아보면 2위로는 1934년부터 1956년까지 발매된 ‘수퍼이콘타’ 3위는 사진인구 저변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미국 코닥사의 ‘베스트-포켓 코닥’, 4위 역시 코닥사의 ‘레티나Ⅲc' 5위 ’롤라이플렉스‘, 6위는 1950년대 발매된 콘탁스 Ⅲa'이다. 이어 7위는 칼라스코파 F3.5 50mm가 장착된 ’비데사‘, 8위 ’수퍼뷰‘, 9위는 일본니콘사 최후의 파인더형 카메라인 ’니콘sp' 10위 역시 일본의 ‘펄Ⅳ’, 11위는 ‘콘뎃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5년 당시 35mm 카메라로서는 최고급으로 꼽혔던 ‘코닥엑트라’ 가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기라고 하는 의미는 이기종이 여기에 등장하지 않은 다른 기종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하다는 뜻은 아니며 명기만이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는 등식은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필자는 최고의 명기란 사진가 자신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작품에 적합하다고 확신하는 기종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단지, 필자는 그동안 단편적인 소개와 구전을 통하여 피상적으로 알려져 왔던 명기의 한 종류 라이카의 다양한 기종과 성능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를 통하여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온 독일 장인정신과 이 카메라를 사용했던 위대한 사진가들의 열정을 반추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라이카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30년이 되던 1954년 라이카는 스크류 마운트 카메라 시대의 영광을 마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카메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라이카 M3의 찬란한 새 시대가 개막되게 된다.
기존의 스크류 마운트 카메라와 비교해볼 때 라이카 M3의 특징은 다음 8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첫째로 바이오네트 렌즈 마운트의 채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렌즈를 시계방향으로 30〮〬만 회전시키면 렌즈가 카메라 몸체에 확실히 장착되는 기계구조로서 기존의 스크류 마운트에 비해 렌즈장착을 훨씬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다.
 둘째, 카메라 몸체 뒷부분이 개방될 수 있도록 되어있어 필름장전이 쉽다.
 셋째, 필름은 단 한번의 레바 동작에 의해 정확히 진행될 수 있다.
 넷째, B셔터부터 1/1000초에 이르는 완벽한 셔터스피드의 설정은 카메라 몸체 윗부분에 있는 단 하나의 셔터스피드 다이얼에 의해 간편하게 조작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셔터스피드 다이얼의 숫자판은 다이얼 위에 균등히 분할되어 음각되어 있다.
 다섯째, 새 필름을 장전하며 자동적으로 필름카운트가 재설정되도록 하고 있다.
 여섯째, 전자플래시나 벌브(Bulb)조광을 위한 자동연동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일곱째, 50mm, 90mm, 135mm 렌즈를 장착할 때 자동적으로 뷰파인더에 나타나는 아주 밝은 선으로 표시되는 화각은 이 카메라의 주요한 특성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초점거리 1m 까지는 완전한 패럴렉스 보정이 되며, 아주 밝은 레인지파인더의 이미지(dual image)가 화면 중앙부에 위치하여 포커싱을 손쉽게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레인지파인더의 베이스가 길어져서 정밀한 포커싱을 가능하게 하였다.
실제로 이 같은 카메라를 개발하고자한 라이쯔사의 시도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모든 셔터스피드를 망라하여 설정할 수 있는 단하나의 셔터스피드 다이얼과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를 한 개의 창(窓)으로 통합한 구조 등을 다룬 그 당시의 설계도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고, 라이카Ⅲc 몸체에 이 같은 셔터스피드 다이얼의 시제품이 조립된 적도 있었다.
 웨츨러의 박물관에는 1935년에서 1936년 사이에 제작된 소위 라이카 Ⅳ로 불리워지는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다. 이 카메라는 라이카 M3와 흡사한 셔터스피드 다이얼, 확장된 레인지파인더 베이스와 개방될 수 있는 뒷 덮개를 갖추고 있고 레인지파인더 창 뒷부분에는 밝은 선이 있는 뷰파인더를 끼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컨대 라이카 M3의 출현은 한 마디로 카메라사의 일대 혁명이었고 또한 이 카메라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완벽을 추구하고자 노력한 독일 장인정신의 결정체였다. 라이카 M3에서 채택된 디자인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오늘날 첨단의 M6에서도 변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 카메라의 진가는 입증 되고 있는 것이다.


눌(Null)시리즈M3
 일련의 ‘눌 시리즈 카메라들이 새로운 모델의 사제품으로 제작되었다. 라이쯔사는 1954년에 M3를 선보이기 전 이 ’눌 시리즈 카메라들을 생산하게 되는데 그 정확한 생산매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극히 운 좋은 일부 수집가들에게 이 모델이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카메라들은 M3를 생산하기 전 라이쯔사에서 작업을 위한 샘플로, 또 어떤 사소한 문제들을 결정하는데 있어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라이쯔사는 이 카메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수집하기 위해서 엄선된 라이카 사용가들에게 이 카메라를 대여해주기도 했다.
 
라이카 M3
 너무나 유명한 이 새로운 모델은 1954년에 소개되었다. 일련번호 700000으로 첫 생산에 들어간 이 기종은 1966년 일련번호 1164865로 무려 12년에 걸쳐 제작된다.
 이 카메라의 몸체 앞부분에는 세 개의 직사각형 창(窓)이 있다. 카메라 장면에서 볼 때 왼쪽의 작은 창은 레인지파인더 창이고 중간에 있는 유백색의 창은 프레임을 밝게 하기 위해 빛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큰 창은 뷰파인더이다. 뷰파인더에는 중앙의 레인지파인더 이미지(dual Image)와는 별도로 50mm렌즈용 프레임이 보이는데 이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위치시키면 되도록 하여 프레임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물론 90mm나 135mm 렌즈를 장착하면 별도의 해당 프레임이 뷰파인더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라이쯔 사이에서는 35mm용 광각렌즈를 제작하였는데 이 렌즈의 프레이밍을 위하여 보정대물 렌즈를 두개 부착시켜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 앞에 각각 위치하도록 하였다.
 필름타입의 지시계는 둥근 디스크 형태로 카메라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고 여기에는 주광용 컬러 필름, 인공조명용 컬러 필름, 흑백필름 등의 구분이 있으며 필름감도(ASA/DIN)지시 눈금이 있다. 이 지시계는 라이카 Ⅲg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위의 사진은 첫 출고된 라이카 M3의 모습인데 삼각형의 끈고리가 부착되어있다. 그러나 프레임을 선택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레바(preview lever)는 부착되어 있지 않다. 이 사진에서는 35mm 스마론 렌즈가 장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렌즈에는 보정대물렌즈(corrᅳecting objectives)가 부착되어있다. 뷰파인더 앞에는 카메라에 내장된 50mm 프레임을 이용하여 35mm 화각을 볼 수 있도록 한 컨버팅 렌즈(converting lens)가 위치하고 레인지파인더 앞에는 보정렌즈(compensating objective)가 위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첫 출고된 이후 10년 후의 변화된 모습으로 끈고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장착렌즈 외에 다른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는 프레임 셀렉터가 컨버팅 렌즈 끝에 위치한다.
 이 두 모델의 비교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M3는 그 제작기간 중에 조금씩 개량되어 나간다. 프레임 셀렉터(previer lever)가 부착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의 일로 그 최초카메라의 일련번호는 785801 이었고 1957년 일련번호 844001 라이카부터 필름 압착판(pressure plat-e)의 소재가 유리에서 금속제로 교체된다. 아주 중요한 개선이 1958년 이후 이루어지는데 레바를 두 번씩 젖히도록 되어있던 필름장전방식이 한번 젖힘으로 단축된 일이다. 이 방식은 일련번호 915251부터 채택되었다.
 1956년에는 셔터스피드 다이얼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의 B, 1, 1/2, 1/5, 1/10, 1/25, 1/50, 1/100, 1/200, 1/500, 1/1000초의 배열이 B, 1, 1/2, 1/4, 1/8, 1/15, 1/30, 1/60, 1/125, 1/250, 1/500, 1/1000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동시에 셔터스피드 상의 숫자판을 균등한 간격으로 재배열하였다.
 여기에 별도의 셔터스피드를 추가로 설정하게 되는데 즉 1/30초와 1/60초 사이에 전자플래시를 연동시키기 위한 1/50초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개선작업은 카메라 몸체 뒷부분을 경첩식으로 개량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레인지파인더를 내장하게 된 1957년에 와서 이루어졌다.
 다소 사소한 부분에서도 이 같은 변화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카메라 끈을 걸기위한 고리는 원래 삼각형이었는데 이 후 둥근 모양으로 바뀌었고 초기형의 필름 되감기 노브에 새겨진 붉은색 긴 홈은 하나의 붉은 점으로 교체되고 최종적으로 두개의 붉은 색점으로 음각되어 필름이 제대로 장전되고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덮개 뒷부분에 있던 나사는 후에 제거되었고 경첩식으로 붙은 몸체 뒷부분의 필름 압착용 잠금장치도 사라지게 된다.
 레인지파인더에 있는 두개의 눈금이 뷰파인더를 통하여 피사계심도를 알려주는 장치가 라이카 M2에 내장되어 있는데 라이카 M2등장과 더불어 이 기능이 M3에도 채택되고 있다.
 처음부터 라이카 M3는 크롬으로 도금되었고 약150대 가량의 검은색 라이카 MP의 제작이 그 오랜 세월동안의 유일한 예외였으나 1959년 일련번호 959401로 시작되는 M3 1백대가 검은색으로 생산된 것을 필두가 검은색 몸체의 등장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60년과 1961년 사이에 2백대의 검은색M3가 생산되었고 1962년에는 일련번호 1044001부터 1046000까지 무려2천대의 검은색 M3가 생산되게 된다. 이 이후에도 검은색 M3가 소량으로 제작되어 왔으나 그 양은 4천대를 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이카 M3는 캐나다에 있는 공장에도 그 생산이 할당되었는데 실제로 많은 양이 캐나다에서 제작되었다. 또한 다양한 색깔의 특수한 모델이 군사용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라이카 M3 몸체의 코드명은 IGEMO이고 엘마 f3.5를 장착하면 IMARO, 엘마f2.8을 장착하면 IMO-LO가 된다. 스미크론 렌즈가 발매되면서 M3의 코드명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초기 침동식 스미크론 f2를 장착한 기종의 코드명은 ISUMO이고 그 이후 침동이 안되는 스미크론 f2를 장착한 기종은 ISOUN, 또한 근거리용 포커싱 장치가 별도로 부착된 스미크론 f2를 장착한 기종은 ISMON이 된다. 스마리트 f1.5렌즈를 장착한 M3는 ISAIO, 스미룩스 f1.4렌즈를 장착한 기종은 IMOOT로 각각 그 코드명이 부여되었다.


라이카 MP(프로페셔널)
 라이카 M3를 특수한 용도에 맞게 변형한 라이카 MP는 1956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카메라는 실제로 기자들에게 적합하도록 설계되었고 또 그 목적대로 보급되었다. 이 기종은 1956년에 MP-1에서부터 MP-11까지 총 11매가 제작되었다. 라이카 공장의 기록에 의하면 첫 생산이후 MP-12부터 MP-500까지 제작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 검은색  몸체는 MP-12부터 MP-150까지, 크롬 몸체는 MP-151부터 MP-450까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이쯔사의 출고원장에는 마지막으로 출고된 기종이 1958년 8월 22일에 출고된 MP-402로 기록되어있다.

이 카메라의 특징은 필름카운터가 몸체 밖으로 노출되어있다는 점인데 필름감기 레바 아래 원형의 숫자판 형태를 갖추고 있다. 레인지파인더와 뷰파인더 시스템은 M3와 동일하고 필름 한 컷을 장전하기 위하여 필름감기 레바를 두 번 젖히도록 설계되어있다. 또한 셀프타이머와 후기 M3에 장착되었던 피사계심도지시계는 내장되어있지 않다.
 필름 끼우는 방법을 도해(圖解)해 놓은 몸체 바닥아래에는 몸체번호와 P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몸체 윗부분에 MP란 문자와 일련번호를 새긴 것과 몸체 밑부분에 필름을 신속히 장전하기 위한 LEICA-VIT MP를 부착시켜 발매하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기종에는 필름스풀(filim take-up spool)을 위한 와인딩 샤프트(winding shaft)가 별도로 내장되어 있는데 이 와인딩 샤프트는 M3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후기의 M2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M2기종에서도 LEICAVIT를 사용할 수 있다. (LEICAVIT는 M1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이 기종의 기계적인 특성은 M3와 동일하다.
즉 셔터스피드는 B, 1, 1/2, 1/4, 1/8, 1/15, 1/30, 1/60, 1/125, 1/250, 1/500초로 설정되어있고 뷰 파인더의 프레임은 50mm, 90mmm, 135mm렌즈용 세가지이며 다양한 프레임을 볼 수 있는 프레뷰 레바(preview lever)가 부착되어있다.

<라이카 황금시대의 개막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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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3의 형제들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 미국)를 떠올릴 때 우리는 요세미트 공원의 장관을 떠올리고, 위지(Weege 1899~1968, 미국)에게서는 만화같이 우스꽝스러운 풍자풍의 사진이, 요셉 카슈(Yousuf Karsh 1908~,터키)에게서는 시가를 빼앗긴 윈스톤 처칠 등의 개성 있는 포트레이트가 연상된다. 이렇듯 금세기를 풍미하고 있는 거장들의 작품세계는 한결같이 독특한 개성과 투철한 주제의식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뚜렷한 주제의식 없이 남의 나라 작품경향의 모방에만 급급하고 있는 우리사진의 현실은 너무나 몰개성적이다. 달포 전 쯤 필자는 삼각산 세 봉우리를 주제로 7년 동안 작업한 보잘 것 없는 사진으로 누구나 다하는 개인전을 열었고 이일을 계기로 전혀 뜻하지 않게 TV, 신문, 잡지를 망라한 각종 메스컴에 오른적이 있다. 작품의 수준과는 별개로 단지, 필자의 어설픈 주제의식과 아마추어리즘을 높이 평가해준 까닭에 분에 넘치는 호사를 하게 된 것이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 우리 사진문화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즉 예술사진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 사진인 모두가 본연의 작가정신으로 복귀하여 주제의식으로 무게가 실린 사진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첫째, 주제에 대한 남다를 관심을 가져야 하고 둘째, 그 주제에 대해 필요한 지식과 철저한 이해를 지녀야 하며 셋째, 그 주제에 대해 스스로의 결론을 내려야 한다. 네 번째 과정은 그 대상물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일이며 마지막 과정으로 완벽한 사진기술을 구비하여야 한다.”
 망원렌즈에 의한 특이한 표현과 기술적 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앤드리어스 파이닝거(Andreas Feininger 1906~,미국)는 내용이 있는 사진의 창조는 바로 이 다섯가지 과정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가 평소 흠모하고 있는 몇 안되는 외국작가들 중 유일한 일본작가인 다케시 미스꼬시(1938~,일본)는 이런 점에서 뛰어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는 그의 위대한 사진집 ‘The Hodaka'의 ⌜촬영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일본 북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작품 활동으로 보내면서 나는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와 갖가지 필름을 사용하였다. ・・・발표된 작품 중 90%이상은 35mm 카메라로 작업한 것이다.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서 나는 카메라의 사이즈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점을 충격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라이카 맨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그의 고백을 통하여 필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찬란한 사진사와 더불어 살아있는 그 조그만 카메라 라이카의 위력을 또 한번 실감나게 된다.
 
 
라이카 M2
 단순하면서도 값싼 모델을 지향해온 라이쯔사의 전통적 노력은 1958년  M2기종을 선보이게 된다. 셀프타이머와 필름 카운터의 자동 복귀기능을 제외하면 라이카 M3와 거의 흡사한 특성을 가진 M2는 뷰파인더의 설정과 기능 면에서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해당 렌즈와 연동되어 설정되는 화각은 라이카 M3의 50mm, 90mm, 135mm용에서 35mm, 50mm, 90mm용으로 변경되었다. 135mm용 화각이 광각계인 35mm용으로 대체되면서 일반 사진가들이 광각렌즈의 사용이 빈번한 보도사진가들에게 그만큼 효용 가치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뷰파인더 시스템은 그 이후에 제작되는 라이카M 기종의 설계에 있어 뷰파인더 설정의 기본이 되었고 , 향후 새롭게 제작되는 모든 기종은 여기에 새로운 화각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제작되게 된다. 그러나 35mm용 화각의 설정은 M3에 비해 뷰파인더 상에 나타나는 화상의 상대적 축소를 초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M2의 생산은 1958년 일련번호 926600으로 시작된다. 생산이 시작 된지 1년 만에 자기 자신을 제 사진의 피사체로 포함시키고 싶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셀프타이머가 재 부착된다. 그리고 첫 생산된 M2기종에서는 필름 되감기 버튼이 M3에서의 레바를 대신하게 된다.
 검은색 카메라의 생산이 재개된 것은 라이카 생산 방식의 한 흐름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M2는 검은 색이나 크롬도금으로 생산되었는데 검은색 몸체의 가격은 항상 다소 높게 책정되었다. 처음에는 일련번호 948601로 시작되는 5백대의 검은색 카메라가 발매되고 이어 셀프타이머를 부착한 크롬도금 카메라가 일련번호949101을 시작으로 4백대 제작되었다. 그 이후 수백대의 검은색 카메라가 추가로 제작된다. 셀프타이머의 부착여부와 상관없이  캐나다의 라이카 공장에서도 수백대 단위로 일련번호를 부여받은 라이카 M2가 수차례 생산되었다.
 라이카 M2는 라이카 MP를 단순화 시킨 모델로 보아도 좋을 만큼 라이카 비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종이며 역대 라이카 중에 라이카 M3 다음으로 많은 생산 대수를 기록하고 있다. 라이카 M3가 20만대 이상 제작된데 비하여 라이카 M2는 크롬도금 7만5천대, 검은색1천8백대, 셀프타이머 부착형 4천2백대가 제작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캐나다 공장에서 1천6백대의 M2와 2천대의 M2-R이 제작되었다. 셀프타이머가 부착된 M2는 미국에서 M2-S로 명명되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명칭이 카메라에 정식으로 표기되지는 않았다. 라이카 M2의 제작이 1967년까지 계속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기종은 꽤 성공한 기종으로 평가될 수 있고 또한 연속촬영을 위해 전기모터를 내장한 최초의 기종이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모터는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이 기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뷰파인더를 통해 피사계심도 지시계를 볼 수 있었던 점이다. 이러한 기능은 라이카 M3의 후기 기종에서도 발견된다. 뷰파인더 윗부분의 폭이 넓은 띠 (Tab또는 Notch)와 아래 부분의 좁은 띠가 이 기능을 떠맡고 있을 는데 핀트가 정확히 맞지 않을 경우 피사체의 이중영상(Dual-Image)이 좁은 띠의 범위 속에서 렌즈와 F값이5.6일 때 피사체의 정확한 포커싱을 지시하고 넓은 띠는 렌즈의 F값이 16일 경우에 정확한 포커싱 여부를 지시해준다.
 카메라 몸체의 코드명은 KOOHE, 엘마 F2.8렌즈를 장착하면KIHOO가 되고, 일반적인 스미크론 F2렌즈를 장착하면 KIOOL이 되나 이중거리계가 있는 스미크론을 장착하면 KN-OOG가 된다. 이 기종의 생산기간 중에 발매된 스미룩스 F1.4를 장착한 기종의 코드명은 KSOOB이다.
 라이쯔사는 미국의 주문에 의하여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라이카 M2-R을 생산하고 있다. 이 기종은 훗날 뉴욕의 라이쯔사에 의해 일반인에게도 판매된다. 여기에는 M4에서 사용된 필름을 빨리 장전할 수 있는 스풀(Quick-load Spool)이 사용되고 있고 대부분 이 중거리계가 있는 스미크론 50mm렌즈를 표준렌즈로 채택하고 있다.
 
라이카 MP2, M1, MD
 라이쯔사는 라이카 M2의 제작과 더불어 여기에 걸 맞는 특별한 용도를 위한 카메라를 소량 제작된다. 즉 보도사진가들의 속사(速寫)를 위해 라이카비트나 또 새롭게 선보이게 되는 전기모터를 사용하도록 설계된 MP2, 현미경 촬영이나 광각사진 촬영을 위해 제작된 M1, 또는 M1의 뷰파인더를 제거하고 이를 개량하여 현미경에 부착하여 과학적 용도에만 사용하도록 한 MD가 바로 이러한 기종이다.
 라이카 MP2는 1958년 일련번호 952000으로 제작이 시작되어 512대가 생산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할 때 이때 제작된 기종은 MP용인 라이카 비트를 부착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 MP-2 기종으로 보기 힘들며, 일련번호 935501 부터 935511 사이의 검은색 기종과 952001부터 952015사이의 크롬 기종을 MP2기종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라이카 MP는 M3의 뷰파인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데 MP2는 M2의 뷰파인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고 또한 MP2에는 전기회로가 내장되어 있어서 전기모터 드라이브를 사용하도록 했다. 물론 라이카 MP에서 사용되었던 라이카 비트가 그대로 쓰이기도 했다. 모터 드라이브는 라이쯔사의 자체기술로 제작되기도 했으나 이는 시제품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주로 미국에서 제작된 모터를 사용하였다.
 라이카 M1은 라이카 M2를 단순화한 형식으로 1959년 일련번호 950001로 생산이 시작된다. 이 기종은 현미경 사진촬영을 위한 과학적 용도 외에 광각촬영용으로도 사용하는데 예전의 라이카 스탠다드형과 마찬가지로 레인지 파인더가 장착되어 있지 않으며 뷰파인더에는 50mm용과 35mm용의 프레임이 있다. 패럴랙스는 보장되어있고 라이카 M3나 M2와 같은 셔터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며 셔터스피드의 전 범위에서 플래시가 동조된다.
 이 기종은 라이카 M형 중에서 가격이 가장 저렴한 탓으로 35mm광각렌즈 전용기종으로 구입되기도 했고 특히 비죠플랙스를 부착하여 망원렌즈용으로 사용하려는 고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고객의 요청에 의해 라이쯔 사에서는 레인지 파인더를 부착해서 M2로 변경시켜 주기도 했으므로 카메라 시장에서 M1의 일련번호를 음각한 M2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 경우에 M1의 몸체 앞부분에 부착된 ‘M1'표기의 금속판은 제거된다.
 1965년에 발매된 라이카 MD는 M1의 대체 기종으로 1965년 부터 196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과학적 목적만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뷰파인더나 레인지 파인더는 내장되어 있지 않았고 몸체 밑바닥이 특수하게 설계되어 폭 4mm 정도의 필름 공간에 색인을 새겨둘 수 있도록 하였다, 렌즈 마운트는 라이카 M형 렌즈를 장착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제작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별도의 뷰 파인더를 부착하여 일반 촬영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클래식 카메라 수집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편 업무용 카메라는 이 카메라에서 변형된 것으로 몇몇 나라의 주문에 의해 생산되었고 당시 일반인에게는 판매되지 않아 그 희소가치를 자랑한다.
 라이카 MD의 마지막 일련번호는 1160820이며 약 3천5백대가 제작되었고 라이카 M4의 등장과 더불어 새롭게 선보이게 되는 라이카 MDa에 대체된다.
 
라이카 M4
 기존의 모델형태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연구해온 라이쯔 사는 1967년 일련번호 1175001로 시작되는 라이카 M4의 등장으로 또 하나의 결실을 보게 된다. 이 기종은 라이카 M3와 M2의 장점을 결합한 형태에 약간의 세련미를 가미하였고 기존 기종의 불편함 점을 대폭 개량하고 있다. 즉 사용이 번거로운 구식인 필름되감기 노브의 단점을 몸체 귀퉁이 부분에 경사지게 위치한 크랭크로 극복하고 있고 분리된 스풀(Spool)로 인해 필름 장전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불편과 시간낭비를 새로운 장전시스템(Quick-Load System)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 기종에 있어서 뷰파인더의 화각은 M2의 35mm, 50mm, 90mm용에다 35mm용 화각과 동시에 나타나는 135mm용이 추가되었다, 프레임 셀렉터(preview lover), 셀프타이머, 필름되감기 레바는 M3와 똑같은 위치에 배치되었고 일단 카메라를 개방하면 필름 카운터는 자동으로 ‘-2’를 지시하도록 설계되었다.
 초기 생산품은 크롬으로 도금되다가 검은색 에나멜칠을 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검은색과 크롬도금을 병행하게 된다. 또 라이쯔 사에서는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모터 와인더나 정품인 ‘M4 MOT'를 부착하여 사용할 수 있는 라이카 M4를 소량 제작하였다. 캐나다 공장에 할당된 이 기종의 생산은 공식적으로는 1971년 일련번호 1286700으로 중단되었으나 1973년 말경 라이카 M5 생산을 위해 캐나다와 웨츨러에서 동시에 개발된 새로운 방식의 검은색 크롬도금을 한 소량의 M4가 제작되었다. 이렇게 기종의 몸체 윗부분에는 ’Leitz Canada'가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조립된 초기 기종의 윗부분에는 ‘Wetzlar'가 음각되어 있기 때문에 기종간에 다소간의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이 기종의 셔터 스피드는 B, 1, 1/2, 1/4, 1/8, 1/15, 1/30, 1/60, 1/125, 1/500, 1/1000로 설정되어 있고 플래쉬 연동기능은 M3와 동일하다. 90mm렌즈의 화각과 비슷한 각도의 노출을 측정할 수 있는 전용 노출계인 MR-4가 선보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라이카 MDa
 라이카 M4의 생산과 더불어 라이카를 개량한 MDa가 생산된다. 이 기종에는  M4와 같은
형태의 필름 되감기 크랭크가 부착되었고 셔터 스피드의 범위설정이나 작동메커니즘은 M4와 동일하다. 과학적 목적에 사용되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뷰파인더나 레인지 파인더는 장치되어 있지 않으며 필름에 색인을 기입하기 위한 홈이 별도로 마련되어있다. 일련번호 1159001부터 시작된 라이카 MDa의 생산은 일련번호 1412550으로 마감하게 되고 M4-2와 더불어 제작된 새로운 모델 MD-2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라이카 M4-2
 라이카 M4의 후속기종은 라이카 M5이다. 그러나 라이카 M5가 발매된 이후 전 세계의 라이카 애호가들은 기존 라이카M형 카메라와 너무 판이한 M5대신 이미 생산이 중단되어 버린 M4의 재생산을 요구하게 된다. 고객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1977년 라이카M4-2가 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라이쯔사의 전통이 그러했듯이 라이카 M4-2는 라이카 M4와 거의 흡사하면서 약간의 세련된 외양과 다소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기종은 일련번호 1480001부터 생산이 개시되어 1980년 일련번호 1533350으로 마감하게 된다. 오스카 바르낙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79년에 제작된 그 유명한 금도금 카메라를 제외하면 이 기종은 모두 검은색으로 제작되었다. 이 금장 카메라는 원래 일련번호 1527201부터 1527700까지 5백대가 제작되었는데 라이카 애호가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인해 라이쯔사는 5백대의 추가 생산을 결정하여만 했다. 이렇게 제작된 카메라의 일련번호는 1528151부터 1528650에 이른다. 이 기종의 메커니즘은 셀프타이머가 배제된 점과 전기모터 드라이브를 사용하기 위한 전선과 파워 샤프트(Power Shaft)등 내부 장치를 제외하면 M4와 거의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모터 드라이브는 라이카 M2와 M4에서 사용된 미국 제품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라이쯔사에서 재설계 한 것이며 8개의 밧데리가 사용되던 종래의 미국제 모터와는 달리 4개의 밧데리로 작동되었다. 레인지 파인더 뒷면에 있는 벌브와 전자플래시를 접속시키기 위한 코드는 그대로 남겨둔 채 액세서리 클립에는 플래시를 연동시키기 위한 핫슈(Hot-Shoe)가 추가되었다.
 라이카 M4는 모두 캐나다에서 제작되었다.
이 기종에서 호사가들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Leitz'가 새겨져 있는 빨간색의 조그만 원판이 일련번호 1468001에서 1468091 사이의 91대와 또 추가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 서너대의 몸체 앞부분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약 95대 남짓한 이 희귀한 기종에 호사가들의 관심이 쏠린 탓으로 이 기종의 가격은 매우 비싸다. 따라서 해당 일련번호가 아닌데도 이 문제의 원판이 붙어있는 조작된 카메라가 카메라 시장에서 종종 발견되어 고객을 황당하게 하고 있다.
 
라이카 MD-2
 라이카 M4에서 M4-2로 일련의 교체과정을 거치는 동안 과학용으로 제작된 라이카 MDa는 새로운 모델인 MD-2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MD-2에는 M4-P와 마찬가지로 액세서리슈(Accessory Shoe)에 핫슈가 장치되고 모터 드라이브를 사용하기 위한 전선과 파워샤프트가 내장되어 있다. 이 기종은 전부 검은색으로 도장되어 있는데 경첩식으로 된 몸체 뒷부분에는 필름의 종류와 감도를 연필로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새로운 스타일의 원반형 필름 리마인더(Reminder) 가 있어 이채롭다.
 
 
 
 



라이카 M4-P

 라이카 카메라를 애용하고 있는 사진가의 입장에서 필자는 라이카 M형 중에서 이 기종을 최고로 손꼽는데 있어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라이카 특유의 내구성, M형 렌즈의 거의 모든 초점거리에 연동되는 여섯 종류의 프레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등 M4-P의 확실한 강점은 좋은 사진은 만들어 내기 위해 라이카 카메라를 선택하는 입장에 있은 이들의 최선의 선택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카 M4-2와 거의 똑같은 외형을 갖춘 라이카 M4-P는 라이쯔사의 전통적인 개량방식에 의해 제작되어 1980년에 발표되었으며 그 코드번호는 10415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다양한 렌즈군에 적합하도록 뷰파인더에는 6종류의 화각이 설정되어 한번에 2종류씩 뷰파인더에 나타나게 된다. 기존의 라이카 M4-2화각에 추가된 화각은 28mm용과 당시 새롭게 개발된 스미룩스 75mm F1.4용이며 특히 풍경사진에 탁월한 성능을 자랑하는 라이카 28mm용 화각의 등장은 결코 값이 싸지 않은 별도의 뷰파인더를 액세서리슈에 부착시켜야 했던 종래의 불편과 경제적 부담을 완전히 해소시키고 있다.
 뷰 파인더 상에서 28mm 화각은 90mm와 동시에 나타나고 , 35mm는 135mm와,75mm는 50mm와 함께 나타난다. 또 패럴렉스는 최단거리에서 조차 완전히 보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전 기종에 걸쳐 구형 모터 드라이브는 물론 새롭게 개발된 전자 연동식 모터 드라이브까지 바로 부착시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설계에서부터 셀프타이머는 제외되었으나 플래시 접검은 핫슈를 포함하여 몸체 뒷부분의 소켓까지 모두 3종류이다.
카메라 몸체 덮개의 앞면과 윗부분에는 새로운 로고체가 음각되어 있고 라이카 M4-2에서 언급된 적이 있는 예의 그 빨간색 원판이 몸체 앞부분을 한껏 치장하고 있다. 1913년 미니에이쳐 카메라로 오스카 바르낙이 최초로 시사(試寫)를 했던 날을 기념하여 1983년 크롬도금으로 발매된 2천5백대의 기념 카메라를 제외하면 모든 카메라는 5종의 시리즈로 제작되어 1부터 500까지 고유의 일련번호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 기종의 코드번호는 10416이다.
 ‘Everest '라는 독특한 문자가 음각되어 있는 2백대의 기념 카메라는 오랜 세월 호사가들을 흥분시켜왔다. 이 기종은 캐나다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라이카 M4-P 기종을 사용했다는 것을 기념하여 생산되었다.

<라이카의 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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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우리는 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하여 일본인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의 진면목을 접하게 되었다. 숱한 사상자를 낸 일본 항공기의 추락사고 현장에서 찾아낸 한 평범한 샐러리맨의 메모에는 놀랍게도 그 긴박하고 처절한 순간이 최후까지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메모의 발견은 정작 피해당사자인 일본인이 아닌, 우리 자신을 포함한 전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 주게 되었다.
 일본인의 몸에 밴 이 기록정신은 독창적인 문화전통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들의 문화사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오늘날  경제대국으로서의 기틀을 갖추게 된 한 가지 비결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속적으로 이를 계승시키지 못하고 그 맥을 단절시켜온 우리입장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일본의 카메라 기술은 전통적인 카메라 시장을 80%이상 석권하고 있고, 이제는 그들의 뛰어난 인쇄 기술에 힘입어 세계의 사진문화까지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그들의 광고 전략은 그 특유의 기록정신과 맞물려 그들의 사진문화에 그들이 생산하는 카메라를 같이파는 양상을 가속화시켜가고 있다.
 필자는 그들이 사진작품을 발표하면서 촬영 데이타와 사용 기자재 그리고 필름의 종류까지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들 특유의 세심한 배려이기보다는 똑같은 카메라와 필름을 사용하면 똑같은 작품을 베껴낼 수 있다는 소비자들의 구매욕구를 충동하기 위한 간접 판매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다.
 적어도, 창작예술에 있어 모방이 창작의 전초적 과정 이상이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예술인의 공통된 양식이며 일관된 믿음이다. 그런데 우리 사진계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아주 당연하게 답습되고 있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우리사진계가 일본과 종속관계의 얽매인 것 같아 불쾌하기 그지없다.  최근에 산악사진가 안승일 선생은 그의 작품집 ‘한라산’의 에필로그에서 이 우스꽝스러운 풍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진을 무엇으로 어떻게 찍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사진이 풍기는, 그 사진에서의 감동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하다. 피카소는 어느 나라제 물감을 쓰는가, 구상선생이 무슨털로 된 붓을 쓰는가는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필자는 스스로, ‘카메라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자조적으로 자기를 밝힌 모대학의 사진학과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사진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동료 학생들이 사진예술보다는 카메라 기종에 심각하게 몰두하고 있는 현실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학생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고급기종과 엄청난 고가의 밝은 렌즈에 대한 선호경향은 그들의 지도교수나 사진을 제대로 하는 선배들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일본 잡지 등에서 얻은 정보에 좌우된다고 덧붙인 그 학생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면서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막론하고 우리 사진계가 왠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요즈음 사진하는 이들 속에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밝은 렌즈에 대한 선호는 밝은 렌즈에 대한 몰이해와 값비싼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잘못된 등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특히 F값이 1.0에 이르는 표준렌즈를 놓고 보면 이 렌즈는 그 적합한 용도인 속사(涑寫)에 알맞게 제작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용도를 떠나서는 그 높은 가격에 걸맞는 가치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는 현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광학적으로 볼 때 렌즈의 F값이 과도하게 낮아지면 하레이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수차가 증가될 수 있기 때문에 제작과정에 과잉보정이 불가피해진다.
결국은 이 과정에서 렌즈의 무게와 부피가 늘어나고 렌즈 제작비만 턱없이 비싸지는 것이다. 라이쓰사의 렌즈목록에는 밝은 렌즈를 르포르타쥬용 렌즈라고 확실히 못박고 있고 비교적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유럽계통의 카메라 정보지에도 이런 유형의 렌즈는 고속촬영에 적합한 렌즈라고 정의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이 렌즈는 고속셔터스피드가 요구되는 작업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견해이다. 결국 작업성격과 관계없는 그 비싼 가격과 무게, 부피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 아닌이상 구태여 F값이 밝은 렌즈를 선호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라이카 렌즈의 역사는 오스카바르낙이 당대광학계통의 최고 권위자이며 물리학자였던 막스 베레크에게 렌즈 제작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막스베레크는 1894년 H. 데니스 테일즈가 고안한 Cooke triplet방식으로 최초의 라이카 렌즈인 50mm 엘마F3.5을 만들어 내게 되는 데 이 최초의 렌즈가 3군 5매의 아나스티그마트(Anastigmat)렌즈이다. 라이쯔사는 이 렌즈에 얽힌 특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렌즈의 명칭을 Ernst Leitz Max Berek 의 첫 자를 연결시켜 엘막스(ELMAX)로 개칭한다, 따라서 라이카1에서 다소 사용되었던 아나스티그마트 명칭은 그 이후 ELMAX로 변경되어 표기된다.

1925년 렌즈의 마지막 부분이 1군 2매로 만들어진 3군 4매의 엘마렌즈가 출현하면서 라이카 렌즈는 그 화려한 명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쯔사의 끊임없는 연구는 1931년에 이르러 막스 베레크 교수의 애견(愛犬 )이름을 따서 명명된 헥토르 렌즈를 발매하게 되고, 이어 1933년 스마르 렌즈, 1936년 제논 렌즈 등 다양한 종류의 우수한 렌즈를 계속해서 생산하게 된다.
이글에서 필자는 라이카 렌즈 중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렌즈인 스미크론 50mm F2렌즈와 그에 비해 조리개 스톱이 밝은 스미룩스 50mm F1.4렌즈에 대한 일본의 한 실험결과를 인용하여 이를 토대로 독자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하고자 한다. 표준렌즈는 표준초점거리 렌즈(Normal Focal Length Lens)로 사람의 눈이 한 위치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과 화각이 거의 동일하며, 가깝거나 멀리 있는 물체의 상대적인 크기가 정상에 가깝게 보이는 렌즈로 ‘브루스 데이비슨’을 비롯한 금세기의 위대한 사진가들의 작업에 널리 사용되어온 렌즈이며, 일찍이 “카메라는 나의 눈이 연장”이라고 갈파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이 표준렌즈만을 고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표준렌즈를 대상으로 한 이 실험의 결과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스미크론 50mm F2

 이 렌즈는 1953년 최초로 발표되었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50mm표준렌즈의 최고봉으로 군림에 온 렌즈이다. 근래에 발간된 라이쯔사의 캐털로그에는 이 렌즈가 최고의 화질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표준렌즈이면서, 작고 가볍고 간편한 렌즈이면서, 근접촬영에 있어 그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F2표준렌즈는 가격이 저렴하고 어딘가 2급 렌즈라는 인상을 풍기고 있으나 스미크론은 라이카의 당당한 얼굴로 평가되고 있다. 이 렌즈에는 얼마간의 세대가 있고 시대와 더불어 개량되어 왔다. 일본의 한 실험실에서 행해진 실험데이터를 보면 1978년 라이카 M-2에 조합되어 측정된 일련번호 2609859 렌즈는 그 보정형태가 다소 과잉보정의 경향을 띠고 있으나 그 정도는 극히 미미하여 거의 완전보정형으로 볼 수 있고 구면수차의 크기도 0.07 mm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화면 중심의 구면수차크기의 화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화질은 수차량과 렌즈의 F값과 같이 병행해서 결정되고 같은 구면수차량에서는 F값이 어두워질수록 화질자체는 향상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50mm렌즈이면서 스미크론 보다 1조리개 스톱이 밝은 F1.4 등급의 렌즈중에서도 구면수차의 크기가 0.1mm를 넘는 렌즈는 얼마든지 있다. 즉 스미크론의 특징은 보통의 F1.4 표준렌즈보다 훨씬 적은 수차량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리개 개방시의 F값을 그에다 설정해둔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중심의 해상력이 mm 당 180本 이라는 높은 수치에 이르게 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실험실에 최초의 스미크론이 라이카 M2와 함께 등장한 것은 1959년의 일이었고 그때의 중심해상력은 mm² 당 280本 이라는 경이적인 수치였다. 이 신기록은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스미크론은 원래 6군 7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69년 설계방식이 바뀌어 5군 6매가 된다. 그 결과 1978년 측정된 스미크론과 1981년에 측정된 스미크론의 중심해상력은 180本으로 과거의 해상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해상력만이 화질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같은 변화는 30년간의 개선을 통해 라이카 렌즈에 나타난 어떤 흐름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점수차와 상면만곡을 보면 이 렌즈는 반 화각 20°까지 방사선 방향의 상면과 접선방향의 상면이 꼭 일치하고 있고 상면만곡의 최대량도 불과 0.14mm를 넘지 않는 적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화면 전체의 평균 해상력은 mm당 98本에 불과하나 왜곡수차는 0에 가까운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78년도에 스미크론 50mm F2를 테스트한 일본의 이나무라 다까마사는 핀트가 맞는 부분의 정밀도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평점을 매겼지만 단지 과거의 스미크론에서 볼 수 있었던 아웃포커싱 상태의 묘사성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워하며 그 연구 결과를 마감하였다.
 
스미룩스 50mm F1.4
 고속 스피드가 요구되는 르포르타쥬용 렌즈로서 최상의 해상력을 지녔고 콘트라스트가 뛰어난  콘트라스트가 뛰어난 렌즈라고 라이쯔사 스스로 호평하고 있는 이 렌즈는 라이쯔사의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밝은 렌즈의 결점으로 지적되어온 플레어를 최대한 배제하였고 원색의 재현에 있어 탁월한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1972년도에 라이카 M5에 부착되어 행해진 실험에 의하면 이 렌즈의 구면 수차보정은 필름면에서 멀리 떨어진 최초의 마이너스 축에서 시작하여 필름면 방향의 플러스축으로 되돌아오는 일반적인 형태를 띠지 않고 최후에 다시 한번 마이너스축으로 되돌아오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응집된 수차보정은 고차의 수차보정으로 일컬어지는데 다른 F1.4등급의 렌즈에서는 이 방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방식을 사용할 경우, 과잉정보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레이션이나 플레어의 증대를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F값이 1.4인 이 밝은 표준렌즈는 문자 그대로 개방하여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하여 제작되었다. 일본의 F1.4 등급의 렌즈인 경우 만드는 측과 사용하는 측 공히 한조리개 열면 화질은 그 만큼 나빠진다고 하는 묵시적 동의하에 이 밝은 렌즈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면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조리개 개방시 하레이션의 위험성은 그만큼 증대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피하게 과잉보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정 형식의 렌즈가 항상 나쁜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조리개가 좁혀질 때 핀트의 이동이 없어지면서 화질이 현격히 향상된다고 하는 논리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이에 반해 고도의 수차보정에서는 조리개를 개방시켜도 양호한 화질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 경우에 조리개를 좁힌다고 해서 화질은 크게 좋아지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같은 50mm 표준렌즈에서 스미룩스 F1.4인 경우 구면수차량은 스미크론 F2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고 조리개 개방시 F값이 1조리개 스톱 밝은 까닭으로 스미크론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화질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 그 해상력을 측정한 결과를 보면 화면 중심부분의 해상력은 스미크론이 mm²당 180本인데 비해 스미룩스는 160本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실험실의 결과  보고서에서는 “스미룩스는 고차의 수차보정이 행해졌으나 잔류수차량은 미미하고 조리개 개방시에도 하레이션은 거의 없다.”라고 기술되어 이 렌즈가 산뜻한 화질을 얻는데 있어 아주 우수한 렌즈라는 평가도 얻고 있다.
 이 렌즈의 비점수차와 상면만곡을 놓고 보면 방사방향 상면과 접선방향 상면은 조금 떨어져 화면 주변부에서 다시 한번 일치하고 있고, 따라서 화질은 화면 주변부까지 양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면 평균 해상력은 mm² 당 98本에 이르는 높은 수준이며 왜곡수차도 타르형 렌즈에 비해 1.6% 적은 것으로 되어있다.

<라이카의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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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계 내장방식의 라이카
불세출의 사진가 안셀 아담스는 생전에 M형 라이카를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저서 ‘The Camera'에서 렌지 파인더 카메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하고 있다.
 “렌지 파인더 카메라는 일안리플렉스 카메라에서의 필수장치인 반사경(mirror)이나 프리즘이 없으므로 대체로 소형이고, 작동시에는 기계의 진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 뷰 파인더를 통한 영상은 매우 밝기 때문에 조명이 약한 곳에서도 정확한 포커싱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저속 셔터 스피드를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나타난다. 그 최대 결점은 뷰 파인더를 통해 볼수 있는 영상이 필름에 맺히는 영상과 갖지 않다는 데 있다, 더구나 화각의 구석 부분까지 면밀히 ‘읽어내는 일’은 매우 힘들다.”
 현명한 사진가는 자신이 선택한 기종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알고 있으며 오랜 숙련을 통하여 그 단점을 극복해나간다. 카메라 제작회사의 자신감 넘치는 화려한 상품선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사진가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카메라는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진가는 자기 작업 성격상 적합한 특성을 지닌 기종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전제로 기종을 선택한 이상 그 카메라가 마치 자기 신체의 일부로 느껴질 만큼 친숙해지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좋은 카메라는 작품을 위해 쏟는 사진가의 열정에 의해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명품이란 전가(傳暇 )의 보도(寶刀)일지언정 마법의 엑스칼리버(Exc-alibur)일 수는 없다.

 사진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M형 라이카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렌즈성능과 조용한 셔터 그리고 저속 스피드의 우수성을 것이다. 일안리플렉스에 비하여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사용상의 번거로움은 이러한 매력에 의해 충분히 극복되고 있고 이것이 그 유명한 라이카 신회의 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라이카 렌즈의 빼어난 기능이 열악한 촬영조건에서 선예한 계조와 민감한 분위기를 풍부하게 재현해낼 수 있도록 라이카의 몸체는 정밀한 셔터 등 완벽에 가까운 기능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라이카의 몸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구성을 자랑한다.
 라이쯔사의 경영철학은 끊임없는 개량작업을 통한 우수한 소재 개발로 이어졌고 이는 독일 특유의 장인정신과 유감없이 맞물려 ‘대를 물려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뛰어난 내구성은 장래 라이카 시장의 위축을 예고하고 있었고 고급 기술진에 대한 고임금을 포함한 생산원가 상승 등의 악조건과 겹치면서 라이쯔 왕국을 경영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이러한 시점에 품질이 뛰어나고 저렴한 일안리플렉스 카메라의 대량보급은 라이카 카메라의 일대 변신을 불가피 하도록 했다. 결국 라이쯔사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하여 일안리플렉스 카메라인 라이카 플렉스를 개발하게 되고 또 노출계 내장타입의 전혀 새로운 형태의 M형 라이카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출계를 내장시키기 위해 크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던 라이카 M5가 발매된 이후, 기존 M4형의 라이카를 원하는 고객의 강한 요구에 의해 제작된 M4-2, M4-p가 M5의 인기를 능가하고 오랜기간 생산된 점을 미루어 보아 라이카 M5가 그리 성공적인 모델이 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또 편리하고 정밀한 전자식 노출 측정 방식을 채택한 M6를 놓고 보더라도, 이 기종은 내장된 첨단 컴퓨터 방식의 회로가 우천이나 충격에 의한 고장 가능성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이상 내구성에서 라이카의 전통을 잇지 못하는 기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악천후와 스릴 넘치는 난코스에 부딪치게 되는 산악사진을 하면서 그 비싼 라이카 M6를 세번씩이나 요절시켜야 했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제로 할 때 고객의 사소한  ‘편리’를 담보로 한 라이카 M형의 노출계 내장은 라이쯔가의 명예에 걸맞지 않는 사치일수도 있다.
일안리플렉스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렌즈를 통한 노출측정’기능을 갖추고 있지 못한 ‘렌즈를 통한 노출측정’기능을 갖추고 있지 못한 렌지 파인더식 라이카의 치명적인 결점은 라이쯔사의 경영위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카메라 몸체 윗부분에 별도로 부착할 수 있게 만들어진 노출계는 라이카 특유의 모양새에 어울리지 않았고 실용성에조차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라이쯔사에서는 노출계 내장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는데 그 생산에 앞서 셀레니움 노출계를 내장한 두 종류의 카메라를 시제품으로 선보이게 된다.
 
라이카 M5
 전혀 색다른 라이카로 1971년 소개된 이 카메라는 TTL 노출 측정 방식을 채택한 최초의 렌지 파인더 카메라인 라이카 M5이다. 사실상 시제품으로 생산되었으나 눌 시리즈로도 불려졌던 최초50대를 제외하면 이 카메라는 일련번호 1287001로부터 정식 생산에 돌입한다. M5는 기존에 생산된 라이카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이 카메라는 크고 무거운 기종으로 특징지어진다. 특이하게 모가 난 양모서리 간의 길이는 150mm, 카메라 밑바닥부터 셔터까지의 높이는 87mm, 플렌지를 포함한 카메라의 두께는 35mm 에 달한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상의 변화는 이 기종의 주요특징 중에서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라이카 M5는 CDS 전지로 작동되는 노출측정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고 포칼플레인 셔터 앞에 위치한 수광부(Ce-11 arm)에 의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노출량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노출 측정시 수광부는 렌즈 뒤 중앙부위에 위치하고 있다가 셔터가 열리기 직전 기계내부에 삽입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노출 값은 뷰 파인더 상에서 노출계의 지침이 셔터 스피드 지시눈금과 일치하는 곳에서 결정되고 이 노출값에 의해 셔터스피드와 조리개값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바야흐로 이 카메라는 렌즈를 통한 노출 방식(Through the lens metering)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종에서 렌지 파인더와 뷰 파인더는 라이카 M4의 디자인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사용하고 뷰 파인더는 M4와 같은 35mm, 50mm, 90mm, 135mm화각을 채택하고 있다. 35mm 렌즈 화각의 밑부분에 해당하는 뷰 파인더의 밑변을 따라 셔터 스피드의 눈금이 1/2초 부터 1/1000초 까지 배열되어 있는데 여기에 현재 설정되어 있는 셔터 스피드를 나타내는 지침과 노출량에 따라 좌우로 움직이는 지시계가 내장되어 있다. 수직방향으로 위치하는 지침과 사선 방향의 지시계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정확한 노출값이 결정되는 것이다.

 35mm렌즈를 장착할 경우 결정되는 노출값은 35mm용 뷰파인더 화각에 국한된 스포트(Spot) 측광 방식의 노출값이며, 이경우 피사계 심도까지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련번호 2314920 이후의 28mm 광각렌즈는 이 노출 시스템에 적합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그 이전에 발매된 렌즈와 21mm렌즈, 15mm렌즈 사용시에는 수광부가 차단되어 노출기능을 상실하게 되므로 별도의 수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초기에 발매된 21mm F4나 F3.4계통의 렌즈를 장착할 때에도 이같은 수정 작업이 별도로 행해지지 않으면 셔터막에 매달린 수광부나 렌즈 뒷부분의 볼록렌즈에 손상을 초래하게 된다. 또  50mm 엘마 렌즈처럼 접혀지는 렌즈, 이른바 침동식 렌즈계에 속하는 50mm 스미크론이나 90mm 엘마를 이 기종에 장착할 경우에 렌즈를 침동시키게 되면 수광부가 파괴된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방향으로 프레뷰 레바를 힘껏 젖히면 밧데리 기능을 체크할 수 있다. 라이카 플렉스에서와 같이 셔터 스피드 다이얼은 필름감기 레바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나 필름감기 레바 아래 위치하고 있어서 라이카 플렉스의 그것과 구별된다.
셔터 스피드는 1/2초부터 시작되어 전통적인 나열방식인 1/4, 1/8, 1/15, 1/30, 1/60, 1/125, 1/250, 1/500, 1/1000초로 설정되어 있다. 1/2초에서 1/30초에 이르는 중저속 셔터 스피드 기능을 위해 셔터 스피드 다이얼 상에 일반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1초’가 생략된 것도 주요한 특징으로 손꼽을 수도 있다. 이 스피드는 셔터 스피드 다이얼에 별도로 표기되어 B셔터 기능을 나타내는 호(弧) 형태의 선 내부에 2481530초 와 더불어 설정되어 있다. 이 같은 설정은 이 기종의 노출측정기능이 30초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이루어졌고 이 초저속셔터의 작동은 B셔터속에서 케이블 릴리즈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행해지도록 되어있다. 또 이 범위 내에서 셔터 다이얼은 걸림쇠(click)가 없다.
 카메라 몸체 상단부에는 필름 카운터와 필름감도 다이얼이 장치되어 있다. 필름 감도 다이얼은 방사형으로 홈이 파져있는 볼록한 돌출물의 형태를 띠고 있고 그 안쪽에는 DIN과 ASA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그만 창이 두개 있다.

 카메라 몸체 앞부분에는 플레임 셀렉터와 필름 되감기 릴리즈, 셀프타이머가 위치하고 있고 카메라 밑바닥 한쪽에는 접혀지도록 만들어진 필름되감기 크랭크, 또 다른 한쪽에는 삼각대를 끼울 수 있는 홈이 새겨진 잠금장치가 있다. 3mm의 콕셜(coaxial)플래시 점검 부위는 몸체 윗부분 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자플래시에 연동되는 가장 빠른 셔터 스피드는1/50초로서 스피드 다이얼 위에 표시되어 있다.  
카메라 몸체 앞부분에는 플레임 셀렉터와 필름 되감기 릴리즈, 셀프타이머가 위치하고 있고 카메라 밑바닥 한쪽에는 접혀지도록 만들어진 필름되감기 크랭크, 또 다른 한쪽에는 삼각대를 끼울 수 있는 홈이 새겨진 잠금장치가 있다. 3mm의 콕셜(coaxial) 플래시 점검 부위는 몸체 윗부분 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자플래시에 연동되는 가장 빠른 셔터 스피드는1/50초로서  스피드 다이얼 위에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카메라 몸체 중앙 상단부분의 액세서리 슈에는 플래시를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도록 핫 슈(hot shoe)점검이 있으며 그 이전에 생산된 다른 종류의 라이카 M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모양인 경첩식으로된 몸체 뒷부분에는 사용중인 필름 종류와 감도를 상기시켜 줄 수 있도록 한 필름 타입 리마인더(Reminder)와 간단한 노출계산표가 붙어있다.
 번거로운 필름장전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이 기종의 설계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는 라이카M4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하게 생긴 끝이 세갈래로 갈라져 있는 분리형 스풀이 사용되는데 이 스풀은 기능면에서 확실히 실용적이다.
 카메라 몸체의 양쪽끝의 돌출된 고리에 걸게 되어있던 어깨끈은 몸체 오른쪽 옆면 상하로 납작하게 부착시킨 고리에 걸게 하여 수직방향으로 카메라를 휴대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고 그 두개의 고리사이로 밧데리를 끼울 수 있도록 했다. 후기에 발매된 라이카 M5의 몸체 왼편에는 또 하나의 고리가 추가로 부착되는데 이는 고객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한 라이카의 세심한 배려로 파악된다.
 기존 기종과 달리 이 기종의 몸체 앞부분에는 ‘LEICA M5'가 대문자로 음각되어 있고 몸체 윗부분에는 ’Leica' 대신 ‘Leitz'가 필기체로 새겨졌으며 그 밑으로 ’Wetzlar'와 ‘Ger-many' 가 음각되어 있다. ’EMBH'와 ‘DBP'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일련번호는 액세서리슈의 가장자리에 새겨졌다.
 이 기종은 흰색 또는 검은색 크롬으로 도장되었다.

라이카 CL
 콤팩트 라이카(Compact Leica)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지어진 CL 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라이카 CL은 라이카 최초의 콤팩트 카메라로 1973년에 선풍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최소한의 크기와 새로운 렌즈, 여기에 웨츨러의 우수한 기술진에 의한 설계를 접목시키기 위하여 라이카 CL은 독일 (獨日 )양국간의 합의하에 일본 미놀타사에서 제작된다. 라이카CL의 생산은 일련번호 1300001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작은 크기에 일반 카메라의 모든 기능을 함축한 까닭에 라이카 CL은 당연히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기종의 최대 장점인 교환렌즈 장착기능을 차지하고 라도 라이카 CL은 금세기에 있어 35mm 콤팩트 카메라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원조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몸체 길이 120mm, 높이 75mm, 그리고 두께 32mm에 불과한 이 소형 카메라는 이 기종을 위하여 특별히 개발된 스미크론-C40mmF2 와 엘마-C90mmF4 렌즈 뿐만 아니라 기존의 M형 렌즈를 사용할 수 있도록 라이카 M형과 똑같은 렌즈 플렌지를 채택하고 있다. 단지, 라이카 M5와 거의 흡사한 수광부를 가지고 있는 탓으로 침동식 렌즈를 쓸 경우 M5와 마찬가지의 제약을 수반한다, 렌즈들은 밑변의 길이가 단지 31.5mm에 불과한 렌지파인더와 변동되어 그 결과 정확성에서 돋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성은 이 기종이 M5와 거의 흡사한 ‘렌즈를 통한 노출 측정’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카메라 몸체 윗부분에는 필름감기 레바와 릴리즈버튼, 그리고 기존의 눈금과 숫자대신 2,4,6,8 식의 숫자만으로 표시되는 자동 복원식 필름 카운터가 장치되어 있다. 플래시 접검이 있는 핫슈는 몸체 윗부분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기종에서 전자플래시나 벌브조광을 위한 유일한 장치이다. 셔터스피드는 B셔터를 포함해서 1초, 1/2, 1/4, 1/8, 1/15, 1/30, 1/60, 1/125, 1/250, 1/500, 1/1000초로 설정되어있다. 또 1/30초와 1/60초 사이를 제외한 모든 셔터 스피드 사이에서 중간 스피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뷰 파인더의 윗 부분에는 셔터 스피드 색인이 나열되어 있고 노출지시계는 뷰 파인더의 오른쪽에 나타난다. 이 기종에서 정확한 노출값은 노출지침이 눈금의 중앙에 위치할 때 구해진다. 몸체 밑바닥 중앙에 위치한 고리를 반 바퀴 돌리면 한조로 구성되어 있는 카메라 윗부분과 바닥이 분리되고 이 한가지 동작만으로 필름 장착과 밧데리 교환이 가능해진다. 이같은 방식의 개폐장치 덕분에 경첩식 뒷부분에 있었던 압착판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기종에는 노출 수광부가 필름막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련번호 2314920 이전의 엘마 28mm렌즈나 모든 종류의 21mm 렌즈, 홀로곤15mm를 그대로 장착할 수 없고 꼭 사용해야 할 경우 별도의 수정작업을 거친 후에야 사용할 수 있었다.
 라이카 CL의 몸체 정면에는 ‘LEICA CL' 이 대문자로 음각되어 있고 몸체 윗부분에는 ’Leitz Wetzlar' 가 필기체로 표기되어 있다. 또 몸체 밑바닥에는 ‘made in Japan for Leitz Wetzlar'와 ’DPB US PAT'가 각각 음각되어 있다. 일련번호는 액세서리슈 위에 음각되어 있는데 이 액세서리슈는 카메라 내부에서 고정되어 있는데 이 액세서리슈는 카메라 내부에서 고정되어 있으므로 제거하기 힘들게 되어있다. 이 편리한 카메라에 셀프타이머는 장착되어 있지 않다. 라이쯔 사에서는 ‘장치할만한 공간이 전혀 없기 때문에 ’란 답변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요 메커니즘의 재배치와 상하로 작용되는 셔터막의 고안 등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인하여 모든 기능을 구비한 라이카 CL의 소형화가 가능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나타나는 뷰 파인더는 단순화의 극치로 보아 손색이 없다.
 라이카 CL인 1975년 까지 생산되었다.

라이카 M6
 렌지 파인더 카메라 역사상 최첨단 기술에 의해 제작된 기종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라이카 M6는 1984년 가을에 발표되어 지금까지 장기간 생산되고 있다. 이 기종은 그 유명한 라이카 M4의 몸체에 완전전자식 노출계를 내장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전에 생산된 노출계 내장방식의 카메라인 라이카 M5와 라이카CL과는 달리 이 기종에서는 실리콘 광전 변환장치(Photodiode)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 장치는 카메라 몸체 윗부분에 고정되어 화상면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두장의 필름막중 전막(前幕)에는 화상면의 13%를 차지하는 지름 12mm의 은색 둥근 점이 있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수광부로 반사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감광소자(感光素子)와는 별도로 몸체의 앞면에는 밧데리 박스가 위치하고 있고 전자회로로 연결된 모든 부품의 인쇄배선과 필름 감도계가 경첩식 으로 된 몸체 뒷 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이 카메라는 단지 극도의 편리성을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카메라 몸체 뒷 부분의 원반에 입력시킨 필름감도 정보는 몸체 뒷판이 닫힐 때 세개의 금박 접검에 의해 컴퓨터로 전달된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이 정확히 측정되면 렌즈조리개 구경과 셔터스피드는 자동적으로 컴퓨터에 전달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릴리즈 버튼에 약간의 압력을 가하는 순간 순식간에 수행된다.

 
 
 
컴퓨터에 의해 측정된 노출값은 뷰파인더를 통해 두개의 붉은 삼각형(LED)으로 지시된다. 두개의 붉은 삼각형이 동시에 밝아지면 적정노출 상태를 가리키고 한개나 둘다 꺼지면 조리개나 셔터 스피드 다이얼을 삼각형의 지시방향으로 돌려서 정확한 노출상태를 찾도록 하고 있다, 삼각형으로 된 노출 지시계는 릴리즈 버튼에서 손을 뗀 이후 약10초 정도 지속되다가 저절로 꺼져 밧데리의 소모를 최소화 하고 있다.
입력 가능한 필름감도는 ASA6부터 ASA6400까지 이는 ASA100 필름을 사용할때 1초부터 1/1000초에 이르는 범위에서 조리개 F32까지 실제 사용가능 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보다 전문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감광도가 1평방미터당 0.125에서 125,000칸델라(Candela)에 이른다는 뜻이 된다. 이 기종은 TTL 스포트(Spot)측광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뷰파인더에서 어떤 부분이 측광대상이 되는지 미리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이카 M6에는 M4-p와 같은 뷰파인더가 사용되고 있는 6개의 화각이 프레뷰 레바에 있으며 벨브조광을 위한 점검이 더이상 사용되지 않는 대신 섬광등(Flash Lamp)은 셔터스피드 1/30초 범위 내에서 사용가능하다. 전자 플래시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최고속도는 1/50초이며 이는 스피드 다이얼 위에 화살표시로 새겨져 있다.
 이 카메라는 모터 드라이브를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 이 기종은 기계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밧데리가 작동되지 않더라도 노출 측정기능 외의 전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이러한 까닭에 흔히 ‘전자 노출계와 순수한 기계식 셔터의 이상적인 결합’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카메라에 음각된 문자에도 다소간의 변화가 발견된다. ‘LEICA M6' 가 대문자로 몸체 정면에 새겨져 있고 라이쯔사의 로고체가 인쇄된 붉은 원반이 몸체 앞부분 중앙 상단에 부착되어 있다. 몸체 윗부분에는 ’Ernst Leitz Wetzlar Gmbh '가 음각되어 있다.

 라이카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카메라 시장에서 접하게 되는 숱한 주장들을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주로 호사가들의 구전을 통해서 전달되는 근거미상의 ‘라이카론’은 근거의 유무를 막론하고 수집가가 아닌 사진가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보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당시의 무역관행이나 라이쯔사의 시장정책 등의 내용이 간과된채 동종의 렌즈나 몸체를 놓고 벌어지는 본토 제품 우위론 같은 설도 있다, 즉 웨츨러 공장제품이 캐나다 밀라노 공장제품에 비하여 그 품질면에서 월등히 앞서고 있고 두 공장에서 사용되는 원자재에서조차 질적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다, 추측컨대, 이같은 주장은 상대적 가격 비교에 의한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된 오해인 듯 하고 여기에는 물론 카메라상 들의 이해관계도 적지 않게 작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사진을 하는데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러한 속설들이 단지 호사가들의 입방아쯤으로 치부되어야 하며 사진인 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연재를 마무리 하면서 필자는 ‘라이카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대신한다, “라이카의 정신은 사진가의 순수한 감정과 표현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데 있다, 본질을 향한 집념(Concentration on Essentials). 이것이 라이카의 철학이다.

<특집 - Everything of Le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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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발명된 이래 150년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제 사진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친숙한 것이 되었다.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부터 완전자동카메라 출현에 이르기까지 그간 고안되어온 흥미롭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는 현재까지 이어져 새로운 기술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화학적으로 사진을 보존하려는 수많은 시도는 몇세기를 거치는 동안 추진되어, 수많은 1826년 니에포로 니엡스, 1835년 탈보트, 1837년 다게르 등에 의해 독창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세사람의 방법은 몇몇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만 화학적 처리가 가능한 불편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후 1871년 영국인 의사 리차드 마독스에 의해 ‘브롬실버’ 라는 건조건판이 발명돼 오늘날 현상법의 기초가 되었으며, 1888년 미국인 죠지 이스트만은 단돈 25달러에 카메라를 선보여 사진의 대중화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카메라 크기가 컸을 뿐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확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작은 포맷의 카메라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작은 카메라 발명과 네거티브필름을 확대하고자 하는 구상은 사실 사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1839년 12월 오거스트 반 스텐힐에 의해 이미 8?11㎜ 신형 포맷이 소개됐으며 19세기말에 이보다 약간 큰 카메라 제작을 위한 시도는 있었으나 이것을 상품화하는데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1914년 독일 어네스티 라이쯔 렌즈공장의 실험실장이었던 오스카 바르낰은 35㎜ 영화필름을 카메라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 카메라모형을 제작했다. 이로써 정확하고도 훌륭한 렌즈가 내장된 작은 카메라가 탄생, 라이카의 시발을 알렸다. 오늘날 라이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초의 라이카는 1/20 내지 1/40초의 셔터속도와 막스 버렉 박사가 개발한 f4.5, 초점거리 42㎜인 라이쯔 밀러(Milar)렌즈를 장착하고 있다. 이 모형은 그후에도 계속 발전돼 소형사진과 르뽀사진의 출발을 장식했다.
소형 카메라시대 예고
조심스럽고도 불안한 주위의 시선속에서 시작한 라이카는 짧은 기간내 확고한 위치를 확보, 소형카메라 시대를 예고했다. 사진기자들은 새로운 사진세계를 가능케 한 이 소형카메라의 전망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 그 시대엔 라이카뿐 아니라, 칼 자이쯔 사가 ‘콘텍스’라는 카메라를, 그리고 2년후엔 코닥에서 가격이 저렴한 ‘리티나’를 선보여 경쟁체제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 제품은 상대적으로 라이카를 보다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불과했다.
라이카는 곧 교환렌즈를 개발하였으며 1930넌에 이어 35㎜에서 135㎜까지의 각종 교환렌즈와 1932년 모델Ⅱ형부터 본체에 연동거리계를 창작하였다. 모델Ⅲ에서는 저속셔터(Slow Shutter)가 새로이 부착되었으며, 1935년에는 모델Ⅲa에 1/1000초의 고속셔터가 채용되었다. Ⅲc 모델부터는 신디자인의 몸체와 다이케스팅 제조공업을 도입하여 양산체제를 준비하였던 시기였다. 유명한 ⅢF 카메라는 플래시싱크로와 셀프타이머가 부착되었다.
1954년 라이카는 그 역사상 획기적인 변모를 한다. 전세계 유명한 사진가들과 카메라 설계부분에 종사했던 수많은 기술자들을 경악케 했던 M3가 출현한다. 신속, 편리, 확실하다는 영어 첫글자의 M 이니셜을 채택하고 교환렌즈별로 파인더내에 화각이 자동으로 바뀌는 시스팀을 이 작은 몸체에 내장시켰으며 이에 따른 각종 신형 교환렌즈별로 파인더에 화각이 자동으로 바뀌는 시스팀을 이 작은 몸체에 내장시켰으며 이에 따른 각종 신형 교환렌즈를 발표했다. 스크류 교환방식에서 바이어넷의 신속 확실한 렌즈의 교환방식으로 바뀐 M3 모델은 전(前)모델의 많은 불편을 일시에 해결한 걸작으로 꼽힌다.
예를들면 필름장진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개폐가능한 뒷판, 전속도 일축불회전의 셔터기구 채택, 패럴렉스 완전자동수정, 필름생속이송의 레버방식채택 등 M3는 현재 M6 원형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1950년대에 이런 신식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최근 모델에는 파인더에서의 확인할 수 있는 노출계를 내장하였으며 과거 모델에 비해 크기도 약 3㎜정도 커졌고 약간 둥근모양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기본적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후에도 기본에는 변함없는 일련의 모델들이 36개 정도 개발됐고, 많은 모델들이 등장했다. 이로써 라이카는 영원히 그 기능면에서 변함없음을 증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75년이라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구식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지성적 수(手)제품

최초의 라이카 모델은 사진을 위해 아주 꼭 필요한 것만을 갖추고 있는데 특히 고도의 정확성과 질을 자랑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카메라 제작이라는 차원에서 나아가 독일의 광학산업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인류를 위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철학을 심어주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라이카의 기본 철학은 렌즈와 기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렌즈와 기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 셔터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러한 라이카의 노하우는 손의 지성에서 비롯된다.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 제품기술의 경험을 쌓은 렌즈 및 기계 기술자 칼 켈너(karl Kellner)에 의해 주도된 라이카의 기술은 오늘날에까지 전수돼 영구성을 보여준다.
라이카 실험실/사진을 찍어 카메라 작동의 정확성과 기타 여러가지 성능을 검사한다. 홍보실에 근무하는 Wiesner양과 기념 촬영한 황윤국 특파원

두개의 시스팀으로 사진의 모든 요소 충족

라이카는 두가지 시스팀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고전적 스타일인 렌지파인더(거리계)카메라형이다. 이는 1914년 초기의 카메라와 같은 식으로 오늘날 M6에 해당된다. 나머지 하나는 싱글렌즈(일안)카메라 즉 SLR카메라이다. 자유스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어파취 카메라인 라이카 R-E와 멀티모드 카메라인 라이카 R5, 창작력 발휘를 위해 전자동으로 조정되는 R6 등이 있다. 라이카의 이 두가지 시스팀은 사진촬영에 있어 모든 요소를 충족시킨다. 또한 다른 업체에서 생산되는 모든 렌즈는 항상 라이카의 렌즈에 비교된다. 라이카 렌즈는 첫 번째 키메라 제작에 공급된 막스 버렉의 렌즈인 엘막스(Elmax)와 엘마(Elmar)이다. 렌즈의 우월성으로 라이카는 항상 선두주자를 지켜오고 있으며 세계최고의 렌즈로 대표되고 있다.
시장조사결과에 따르면 라이카의 가치 즉 퀄리티, 기술, 단순한 외형 등은 아직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라이카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술철학을 통합, 더욱 시장성을 강화시켰다. 그 첫째는 기술의 한계까지 개발한 광학의 고성능이고 둘째가 신뢰할 수 있는 기계의 정밀성, 셋째는 자체적인 창조적 개발을 위한 기본요소의 강화기능 등이다.이러한 철학아래 사진부문을 독립시켜 중점적인 개발에 들어갔으며 1988년 졸름스(Solms)에 라이카 GmbH를 세웠고, 그리고 라이카역사 75년의 해였던 1989년 라이카그룹을 창설했다. 동그룹들은 포르투갈 라이카 생산공장,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미국, 캐나다 등지에 자체 판매회사를 거느렸으며 생산품으론 각종 카메라, 렌즈, 환등기, 인화기, 망원경 등이 있다. 또한 세계 도처에 라이카 연수코스가, 졸름스엔 라이카 아카데미가 있다.
라이카 카메라 공장
라이카 카메라 공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70㎞ 떨어진 인구 약 6천명의 작은 시골에 위치 하고 있다. 공장면적은 약 1만 2천㎢이며 약 6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현관에 들어서면 약70평정도 되는 리셉션 홀이 보이는데 이곳에 최초의 라이카 카메라 모형에서부터 오늘날의 각종 카메라가 연도별로 진열되어 있어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한다.
라이카공장 내부 복도에는 라이카부품, 렌즈등이 유리장 속에 잘 진열되어 있다. 이 라이카 부품은 포르투갈 라이카공장에서 생산, 이곳에서 조립된다. 이곳 공장에는 구식 모델의 수리 의뢰가 많이 들어오기도 해 특수렌즈 등 부속이 없는 것들은 별도로 제작해 수리한다. 이곳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전문 직공들은 이곳 인근 지방 출신들로 라이카에서 3년간 철저히 직업훈련을 거친 후 평생을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망원경, 현미경, 인화기, 환등기 등은 이곳에서 약 10㎞ 떨어진 베트즈(Wetler)라는 곳에서 만들고 졸름스 공장에서는 카메라만을 제작한다.
연대별 라이카 역사
1914년 : 독일 어네스티 라이쯔 렌즈공장의 실험장이었던 오스카 바르낰에 의해 라이카의 모형개발
1923년 : 어네스티 라이쯔 2세가 바르낰으로 하여금 동카메라를 시리즈로 제작하도록 주 문.
1925년 : 라이쯔찌히 박람회에 처음으로 공개됨. 이 카메라에 사용된 렌즈는 엘막스1 :3.5/50㎜이다.
1926년 : 가격이 저렴한 센트럴셔터가 내장된 컴퍼 라이카가 시장에 선보임. 어네스티 라 이쯔는 처음으로 세 개의 렌즈를 가진 콘덴서 시스팀 ‘울레자(UIej-a)'를 선보였 다. 이 소형사진 프로젝트는 저전압 램프 30V/100V 또는 고전압 램프 100W에 의해 선별적으로 작동된다.
1927년 : 라이쯔의 최초의 인화기인 ‘필로이(Filoy)' 로 인화시작.
1930년 : 스크류 마운트형식이며 35㎜, 50㎜, 135㎜ 세 개의 렌즈와 피사계심도가 표시된 라이카Ⅰ개발.
1932년 : 각종렌즈와 연동되는 연동거리계가 부착된 라이카Ⅱ 선보임.
1933년 : 1/500초의 셔터속도를 가진 라이카Ⅲ 등장. 자동핀트조절기(선명도 조정기)가 부 착된 인화기 ‘포코매트Ⅰ’이 판매되기 시작.
1934년 : 몸체가 큰 라이카 250에 10m 필름을 넣음.
1935년 : 라이카Ⅲa가 1/1000초의 셔터속도을 지니게 됨.
1936년 : 고속도 렌즈인 라이쯔 제논(XENON) (1:1.5/50㎜)은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 시.
1937년 : 작은 사진 슬라이드 프로젝트인ⅧS는 빛을 한군데로 모으는 기능과 새로 개발된 렌즈인 헥토르(1:2.5/ 85㎜ )를 갖춤,
1938년 : 라이카Ⅲb에 파인더와 디스턴스 메터(Distance Meter, 거리계)를 위한 접안렌즈 부착.
1940년 : 라이카Ⅲb에 파인더와 디스턴스 메터(Distance Meter, 거리계)를 위한 접안렌즈 부착.
1940년 : 라이카Ⅲc가 새로 디자인된 몸체를 갖추게 되었으며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개선 이 있었다.
1950년 : 라이카Ⅲf와 플래시싱크로도 이상적인 카메라 선보임.
1954년 : 라이카M3와 교환가능한 렌즈로써 라이쯔회사 역사에 새로운 장을 장식.
1956년 : 6×9cm 네거티브를 위한 인화기 라이쯔 포코매트Ⅱc와 자동선명조정기로 새로운 사진의 척도 수립.
1958년 : 자동 디아프로젝트인 ‘라이쯔 프라도비트’가 시판되기 시작. 이 슬라이드 꽃이는 그후 다른 여러 회사들에 의해 공동으로 사용된다.
1960년 : 세계에서 가장 밝은 광각렌즈 스미룩스(1:1.4/35㎜) 등장.
1963년 : 망원경인 ‘트리노비드’가 날씬한 형태로 시장에서 시판 시작.
1965년 : 라이쯔 최초의 SLR카메라가 힛트를 치기 시작. 이 카메라는 1/2000초의 셔터속 도를 지님.
1966년 : 녹티룩스(1:1.2/50㎜ )는 빛에 대한 강도면에서 뿐아니라 제작기술로 인해 센세이 션을 일으킴. 이 렌즈는 라이카 시리즈중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비구면렌즈이다.
1968년 : 최초의 SLR카메라인 라이카플렉스 SL은 렌즈를 통해 선별적으로 광도측정.
1974년 : 라이카플렉스 SL2에서 노출 측광범위가 확대됐으며 개선된 뷰파인더를 갖춤.
1976년 : 전자장치가 도입.
1978년 : 발전된 기술과 현대적인 디자인을 갖춘 인화기 ‘포코매트Ⅴ35’가 소개됨.
1980년 : 라이카 R4에 타이머, 프로그램모드, 그리고 선별적인 측정이 가능한 기능이 장치 됨. 그리고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새로운 디자인을 갖추게 됨.
1984년 : M시리즈의 새로운 모델인 M6에 렌즈를 통한 내장 노출계 부착. 세계적으로 유일 한 렌지파인더 카메라인 M6는 시각적 성능의 교환렌즈 시스팀을 갖추고 있으며 저소음 셔터와 불리한 조명상태에서도 정확한 선명도를 조정할 수 있는 특징이 있 다.
1987년 : 전자장치를 갖춘 톱모델인 R5에 다양한 프로그램모드와 TTL 플래시 라이트 측 정기를 포함한 각종 자동장치를 내장시킴.
1988년 : SLR카메라인 R6는 개성적 창작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
1989년 : 라이카사진 75년 되는 해’. 레저사진을 위한 전자동 콤팩트카메라 AF-CI 선보임.
1990년 : 4월 제트 제너데 베럭 회사인수. 브라운 슈바이그에 라이카 프로젝션 GmbH를 창립. 영국 및 프랑스에 지사 설립.
라이카M6 라이카R6

[모/델/설/명]

라이카 M6
오스카 바르낰에 의해 제작된 첫 라이카의 기술이 그대로 전수된 모델. 이를 바탕으로 75년간 33개의 시리즈와 특별모델이 개발됐다. 불리한 조명아래서도 명확한 초점을 맞출수 있는 렌지파인더인 M6는 저소음 셔터와 콤펙트한 형태를 자랑한다. 또한 현대의 자동포커스 시스팀과 대체될 수 없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점점 파인더가 개선됐으며 TTL노출계가 내장되었다. 르뽀사진에 적절.


라이카 R6

옛 모델인 라이카플렉스SL, SL2의 후계적모델. SLR카메라로 거리 및 조명을 수동으로 조작. 선별적 또는 전체적인 조명측정이 가능하다. 자동카메라가 선호되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수동카메라를 제공하는 라이카의 철학을 대변하는 모델 중의 하나. 명암이나 움직임의 정확도 등을 자유로이 결정하고자 하는 사진가들을 위해 제작된 것.

라이카 R5, 라이카R-E
자동 및 수동을 원하는 사진가들을 위해 제작된 모델. SLR카메라이나 일부분은 자동으로 작동한다. 특히 R5에 자동부분이 많다. 신축성이 있어 여러 가지 사진촬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카메라이다.
R-E는 선명도가 높아 자유로운 사진촬영에 적절하다. 특히 노출시간을 자동으로 제공한다.

라이카 AF-C1
레저사진을 위한 전자동 콤팩트 카메라. 손쉬운 작동법과 대상물 포착이 용이하다. 기술적인 면보다는 카메라의 근본적인 기능이 우선된 모델.
라이카 R5 1914년 개발된 초기의 라이카 카메라

라이카 렌즈
수년간의 기술개발과 응용의 경험이 반영된 라이카 렌즈는 정확히 깍아내 광택을 한 후 코팅처리한 것이다. 비단같이 부드러운 표면과 극히 적은 오차 그리고 가장 긴 수명을 자랑한 다.
라이카 M6를 위해서는 초점거리가 21~135㎜인 고성능 렌즈가 13종류가 있으며 컬러밸런스와 탁월한 콘트라스트를 지니고 있다.
라이카R6, R5, R-E에는 총30개 이상의 15~800㎜렌즈가 있다.


라이카 환등기 및 확대기
카메라 및 렌즈제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품질검사 기준에 의해 만들어지는 라이카 환등기와 확대기는 그 제작에 있어 카메라, 렌즈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환등기는 1927년, 인화기는 1930년부터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탁월한 시각적 성능을 제공하는 라이카 P2000 환등기는 공간 및 스크린의 크기에 따라 초점거리 35~300㎜의 렌즈 13개를 가지고 있다. 헥토르 F2렌즈를 내장하고 있는 라이카 P150모델은 작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라이카 P155 모델은 컬러플랜 F2 렌즈를 포함한 200㎜ 렌즈까지 갖추고 있으며 탁월한 영상과 자동포커스, 케이블 원격조정 등으로 영사시 편안함을 제공한다.
3~16배 확대가 가능한 라이카 V35 인화기는 최고의 시각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자동 선명도 조정으로 사진의 완성도를 높인다.

라이카 망원경
1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라이카 망원경은 탁월한 선명도 및 컬러 디스토션(색깔의 왜곡)이 없다. 다양한 모델중에도 7×42, 8×42, 10×42렌즈는 주야를 막론하고 가장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다. 콤팩트 형태로는 8×20, 10×25형이 있다.
라이카의 발명자 오스카 바르낰

라이카의 발명자이며 또한 라이카를 개량, 신형으로 개발하는데 위대한 공을 세운 오스카?바르낰(Oskar Barnack)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879년 부란덴부르크주는 리노우에서 태어난 오스카 바르낰은 라이츠에 입사하여 1913년 최초의 라이카인 유알(UR)라이카를 제작하였다. 1914년 제1차 유럽 대전이 일어나 유알라이카가 햇빛을 보게되고 그 이듬해인 1925년에 라이카로 정식 명명되었다. 오스카 바르낰은 1936년 별세했다.
그의 별세는 라이츠회사 근속 25주년의 축하회를 마친 수일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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