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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 zippo

hl1kfb 2011. 3. 24. 22:24

 

 

 

 

 

 

 

 

 

 

 

 

가장 멋진 장군 "풍운의 별' 박정인!

 

1973년 3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갑작스러운 총성이 적막을 갈랐다. 북측 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원을 향해 기습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백골부대 장병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박정인(82·예비역 준장)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은 즉각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아군(我軍)에 대응사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즉각 사단 포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와 155㎜ 곡사포가 적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부상병을 구출하기 위한 연막탄도 작렬하며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백골부대 사단장 출신인 박정인 장군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의 모든 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을 향해 돌진했다. 북한군은 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줄 알고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보복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장군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이유였다. 박 장군은 사단장 이임식에서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며 짧게 소감을 밝혔다. 평생을 바친 군(軍)이었지만, 후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박 장군을 만났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육사 출신인 그의 사무실 한쪽엔 '우리의 적(敵). 부정부패, 친북좌경세력, 적화통일북괴군'이란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박 장군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꺼내자 대뜸 "그렇게 두들겨 맞고, 교전규칙 운운하는 것들이 군인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180㎝에 달했던 체구는 굽었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울렸다.

"부하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데 대체 군 지휘부는 뭘 했단 말인가! 자주포가 고장 났다는데 군 검열단은 뭘 했단 것인가! 전투기는 뭘 했고, 훈련 중이었던 함대는 함포 사격을 않고 뭘 했나! 지하벙커에서 탁상공론만 하면서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박 장군은 최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이 모두 군의 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며 적절한 대응을 못한 장성들은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장군은 "군 지휘부는 상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 상황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요즘 장군 중엔 군인답지 못한 장군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연평도 피란민들에 대한 대응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적 도발 시 민간인들의 비상이주대책 수립은 필수"라고 비판했다.

박 장군은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패망하기 마련"이라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나 월남 패망은 군이 부정부패했고 정신력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가파' 살인집단인 북한에 대응하려면 역사안보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투철한 군인정신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뿐이에요."

 

 

 

 

장지량 前공군참모총장 “해인사 폭격 거부 처형될 뻔”

“내가 잘했다기보다 우리나라의 운수였던 게지요.”


4일 전쟁기념관 한국군사학회 사무실에서 만난 ‘노병’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우리나라 공군의 산증인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84)은 1951년 여름, 무더웠던 8월의 이야기를 마치 어젯일처럼 기억해냈다. 5일 출간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문화재청 역음·눌와)에 나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군인 장지량이 아니라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문화유산 지킴이’ 장지량의 소중한 이야기다.

“51년 8월 중순에 나는 경남 사천의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로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명령이 떨어졌어요.” 그 명령은 “(1개 편대로) 해인사를 점령한 인민군 1개 대대(500~600명 추산)를 소탕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장 중령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고 했다.

“해인사라면 천년고찰이기도 하고, 더욱이 팔만대장경이 있지 않은가? 인민군이 불공을 드리러 간 것은 아닐 테고, 식량조달이 목적이라면 금방 철수할 것 아닌가? 그들이 철수한 뒤에 폭격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장 중령은 즉각 장덕창 비행단장과 김영환 전 대장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풀어놓았다. 두 사람도 흔쾌히 동의했다. 시간이 지나도 전투기가 뜨지 않자 미군 고문단 6146부대 윌슨 대위가 달려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왜 출격하지 않냐고, 명령 불복종이냐고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You know Paris? You know japanese Kyoto? 다급한 마음에 2차대전 때 독일군 폭격을 피해 무조건 항복한 와이장 파리 방위사령관과 일본 본토 폭격 때 고도(古都)인 교토만큼은 폭격목표에서 제외했던 미군을 예로 들었어요.”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일몰이 다가왔고 출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윌슨 대위가 ‘이승만한테 보고해서 목을 자르겠다’고 분기탱천하더군. 윌슨이라는 친구가 얼마나 ‘까칠’하던지…. 일개 미군 대위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승만 리’라고 함부로 부르고…. 험악한 말다툼이 벌어졌지.”

이 일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두 사람(장지량·김영환)을 당장 포살하라”는 명을 하달한다. 해인사를 지키려다 처형당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을 설득했고, 장지량·김영환 중령은 겨우 화를 면한다.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과 고려대장경판(국보 32호)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기록유산으로 나란히 등재됐다. 한 군인의 용기가 자칫 잿더미가 될 뻔한 문화유산을 구해낸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수난의 문화재~’는 장지량 장군처럼 ‘이름없이 빛도 없이’ 문화유산을 지켜낸 사람들 이야기다. 경복궁 자선당을 80년 만에 반환시킨 김정동 목원대 교수, 북관대첩비 반환에 큰 몫을 담당한 초산 스님 등도 현존인물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와 손홍록, 경천사십층석탑 반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 어네스트 베셀과 호머 헐버트, 광화문을 철거에서 지켜낸 야나기 무네요시와 설의식 등 13명의 이야기가 실렸다.

 

 

 

채명신 장군은… 6·25-베트남전 지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장군은… 6·25-베트남전 지휘, 영원한 ‘야전 사나이’"+" | Daum 미디어다음"; viewToday('auto'); //]]>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27일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평안남도 진남포 교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기독교 모태신앙을 갖고 있던 갓 스물의 채 총각은 성경공부를 틈틈이 해 교원자격증까지 따 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지역으로 진주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던 그의 부친과 종교가 문제가 됐다. 공산주의자들의 탄압대상으로 지목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지 석달 만인 12월 작고한 부친과 홀로 된 어머니를 두고 결국 월남할 결심을 하게 된다.

몇 차례의 탈출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서울에서 그는 1947년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48년 졸업 후 52년 미 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OAC)에 입소하기 위해 도미하기 전까지 혈기왕성한 중대장으로 송악산 전투, 태백산 게릴라 토벌전에 이어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온몸으로 치른다. 특히 51년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이끌며 백골병단(白骨兵團)이란 무시무시한 부대명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후 다시 53년 7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연대장과 참모장을 거치며 채명신은 '전장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린다. 58년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60년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파란 속에서도 정치군인으로 변신하지 않은 채 정통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채명신 장군은 69년까지 약 4년간 베트남의 밀림에서 '따이한'의 위력을 떨쳤다. 1972년 별 셋 중장으로 30년을 미처 못 채운 군문(軍門)인생을 마감한 그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특명전권대사로 82년까지 해외공관을 떠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의 견제라고 보는 이도 있다. 신군부가 들어선 후 83년부터는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대 연구원으로, 다시 일본 츄오(中央)대와 게이오(慶應)대 연구원으로 뒤늦은 유학 혹은 유랑생활을 보냈다. 2004년부터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와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금까지 역임하고 있다.

 


 

혁명의 첫 총성 ---- 김인화 대령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권과 감찰이 미치지 않는 해병대는 혁명의 사전 누설의 부작용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계획대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 1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해병 제 1여단은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진두 지휘에 의하여 완전 무장한 제 1대대는 제 2중대 제 1중대, 제 5중대의 순서로 서울 시가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공격 개시선인 염창교에 도착한 해병대는 박정희 소장의 일행과 합류하여 최초의 계획과는 달리 선두 부대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날 안성과 도봉산에서 훈련을 끝내고 밤 10시경 부대로 돌아 온 공수전투단은 혁명의 사전 발각으로 장 참모총장의 부대 장악의 엄명과 출동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의 감독으로 혼란 속에 출동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중 박소장의 내방과 함께 출동의 강행을 독촉받고 계획 시간보다 늦은 새벽 2시경에야 출동을 개시하여 해병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방 야전군 사령부 예하인 제 6군단 포병단은 장 참모총장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감쪽같이 맨 먼저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단 작전 참모 홍종철 대령과 군단 포병 사령관 문재준 대령의 긴밀한 연락하에 신윤창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포병 제 636대대, 정오경 중령 지휘하에 제 1중포 대대와 구자춘 중령의 제 933대대 그리고 백태하, 김인화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제 822 및 제 911대대가 새벽 3시 30분 예정대로 육군 본부 광장에 집결 완료하고 대기하였다.

그동안 제 506방첩대 본부에서 필사적인 저지를 지시하고 있던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사태의 불리함을 판단하고 새벽 1시 30분경 헌병 제 7중대장 김석률 대위에게 헌병 50명으로 한강교를 차단, 최후의 저지를 명령하고 제15범죄 수사대장 방자명 중령에게 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출동한 헌병대는 7대의 트럭으로 한강교위에 3단계의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응전 태세로 대비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한강교까지 진출한 해병대의 선두 제2중대와 충돌, 서울 장안의 고요한 새벽 하늘을 뚫고 군사혁명의 첫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피아간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중과부족의 헌병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혁명군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서울의 중심가를 향하여 진격을 계속, 요소요소를 점령하였으며 4시 30분경에는 서울시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던 시민들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는 요란한 총성과 병력의 이동 및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모두 문을 꼭 닫아걸고 영문을 모른 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새벽 5시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들려오는 군부 궐기와 무력 혁명의 소식은 이 정권의 오랜 독재 집권에 시달리고 4.19 이후의 혼란에 지친 가난한 시민들을 더욱 무서운 불안과 공포의 와중 속에 몰아 넣었다.

4시 30분경, 박정희 소장과 혁명 주동 장교들은 공수단 1개 소대를 인솔하고 남산의 중앙 방송국을 점령, 도피한 아나운서를 찾아내 준비된 혁명 성명서를 낭독하게 하였으며 이 성명서는 이날 새벽까지 혁명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의 소식은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15일 밤부터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광명인쇄소에서 사장 이학수와 함께 김종필 및 이낙선 소령의 지휘로 인쇄된 혁명 공약과 포고문 및 수많은 전단들이 서울 거리에 나붙었으며, 서울 시가는 집총하고 늘어선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1961년 5월 16일, 무력에 의한 군사혁명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거사에 성공한 군사혁명의 주동자들은 16일 상오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내의 모든 항만 및 공항의 봉쇄와 함께 이날 오후에는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 제4호를 통하여 정권의 인수를 선언함과 동시에 민. 참의원과 지방의회의 해산과 정당. 사회단체의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드디어 18일 오후, 그동안 "갈멜 수녀원"에 피신중이던 장면 국무총리가 중앙청에 나타나 9개월간 집권하여 온 정권을 정식으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인계함으로써 거사는 완전히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 오전 9시에 군사 혁명 위원회(5월 19일 국가 재건 최고회의로 개칭)에 의하여 선포되어 1962년 12월 6일까지 계속된 5,16혁명 군사정부는 1963년 12월 17일 제 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2년 반 이상 집권을 하게 되었다.

 


김성은 국방부장관 



김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비롯, 해병대 창설과정, 해병대가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게 된 배경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를 털어놨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64년 1월 김 전 장관과 박종규 경호실장, 이원엽 소장(육사5기)을 대동하고 유성에서 꿩을 사냥했다. 사냥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점심 메뉴로 경호실에서 준비한 쇠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무작정 사냥터 인근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소금을 뿌린 쇠고기 구이를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거지 몇 명이 경호실 요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다가온 것.

박 전 대통령은 "오라고 해라. 함께 먹자"라고 그들을 부른 뒤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우리를 보고 거지 친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주변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은 "어때. 거지가 지프 타고 다니는 것 보았나?"라며 파안대소했다는 것.

그해 4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차 진해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스톱을 전혀 모르던 김 전 장관은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 등의 훈수로 화투판을 휩쓸었다는 것.

이 때 박 전 대통령이 "김 장관, 고스톱 쳐 본 적 없다면서? 그런데 판마다 다 휩쓸어? 이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맞구먼"이라고 조크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해병대사령관이었던 김 전 장관의 명령 없이 해병 부대가 움직였던 일화도 소개됐다.

5월 16일 새벽 당시 고길훈 부사령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김포 해병여단 일부 병력이 오늘 새벽, 탱크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6년 전 자신의 부하였던 김동하 예비역 소장의 꼬임으로 당시 김포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이 1개 대대 병력과 전차 중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했던 것.

해병대가 사령관의 명령 없이 쿠데타에 참가한 것을 뒤늦게 전해들은 맥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없이 김포 해병대가 출동해 혁명에 가담했다. 이는 작전지휘권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 행위다. 지금 당장 출동해 해병대를 복귀시키라"고 호통을 쳤다.

맥루더는 윤보선 대통령에게도 반란군 진압을 위한 작전권 승인을 요청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부터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으로 장 면 씨와 갈등을 빚어온 윤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당시 혁명정부는 미국 측에 확고한 반공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6층 규모의 반공연맹 총본부(현재의 타워호텔) 건물을 남산에 신축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을 상징해 16층 짜리 건물로 신축했으며 각 층에 참전국의 대표를 상주시킬 계획이었으나 참전국에서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한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일화도 공개했다.

해병대의 통영 상륙작전의 전과를 취재하러 온 외신기자들에게 전과를 소개하는 도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정말 놀랍다. 귀신 잡는 해병이다"라고 보도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것.

 

 

임충식 대장

● 한문 : 任忠植
● 생몰연대 : 1922.4.23-1974.1.29
● 출신지역 : 전남 해남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월남최고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약력

*1922. 4 전남 해남 출생
*1946. 6 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3 제 12연대장
*1950. 7 수도사단 제 18연대장
*1951. 6 제 2사단 부사단장
*1952. 9 육군준장
*1952. 9 제 7사단장
*1953. 8 헌병사령관
*1953. 12 육군본부 인사국장
*1956. 11 제 2사단장
*1957. 5 제 6군단장
*1959. 1 육군소장
*1960. 7 제 2훈련소장
*1960. 11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1962. 2 육군중장
*1962. 3 제 5군단장
*1963. 12 국방부 인력차관보
*1965. 4 육군참모차장
*1967. 4 합참의장 및 육군대장
*1968. 8 예편
*1968. 9 국방부장관
*1974. 1 타계

1. 생애

안강.기계지구전투와 원산탈환전투 등을 성공으로 이끈 임충식(任忠植) 연대장은 1922년 4월 23일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1936년 만주의 연길중학을 졸업한 후 광복을 맞은 조국의 간성이 되고자 1946년 5월 1일 경비사관 1기로 입교하여 6월 15일 졸업과 동시에 군번 10121의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되었다. 제3연대에 배속되어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48년 2월 제3여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8월 육군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이어 제6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1949년 3월 육군중령으로 제12연대장에 임명된 그는 6개월 후인 1949년 9월 태백산지구에서 준동하는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설치된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 桓弔恙?발탁되어 2개월간의 토벌작전을 마무리하고 11월 수도경비사령부 제18연대장에 보임되었다. 연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다음해 4월 보병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7일 수도사단 제18연대장으로 복귀하여 철수작전에 참여하고, 8월에는 육군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51년 1월 28일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제3사단으로 예속 변경됨에 따라 2월 5일 제3사단 18연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4월에는 제7사단 부사단장으로 그리고 6월에는 제2사단 부사단장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1952년 9월 육군준장으로 진급, 휴전협정이 체결될 시점에는 제7사단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으로 재임 중 휴전을 맞게 된 그는 곧바로 헌병사령관과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거쳐 제1사단장에 보임되었고, 이어서 제6군단장, 제2훈련소장을 지내고 육본 인사참모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전교사령관과 국방부 차관보, 육군참모차장 등 주요 요직을 거친 그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합참의장 등을 역임하고 1968년 8월 5일 육군대장으로 군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전역 직후인 1968년 9월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어 다음해 3월까지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하는 등 군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1974년 1월 29일 53세를 일기로 타계함으로써 장군의 탁월한 지휘력과 성품을 존경하고 따랐던 많은 동료 및 부하들의 아쉬움을 불러왔다.
장군은 전쟁수행 및 군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수많은 훈.포장의 영예를 안았으며, 미 은성 및 동성훈장과 월남최고훈장 등 우방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음으로써 국군의 위신을 세계만방에 선양하였다. 장군의 유해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2-2에 안장되어 있다.

2. 공적

수도사단 제18연대장 임충식 육군 대령은 1950년 9월 14일부터 11월 27일까지의 기간동안 안강.기계지구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으며, 원산.함흥.어랑천.청진지구의 공략전에 있어서는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총 경주하여 최후 발악을 감행하는 적을 추격.섬멸, 대한민국 국군의 위신을 세계만방에 선양함으로써 1953년 5월 20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13호)을 수여받았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의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 시작한 수도사단 제18연대로 원대복귀한 연대장 임충식 중령은 연대 병력을 이끌고 평택-진천-청주-보은-의성 방면으로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한 직후 수도사단 제18연대는 의성지역에서 제8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진출을 기도하던 북한군 제8사단과 제12사단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에 돌입하였다. 제18연대는 의성 북쪽 향로봉과 토곡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적 제8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던 제8사단의 향로봉 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이의 탈환에 나섰으나, 적 제12사단의 침공으로 부득이 보현산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낙동강방어선에서 적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제18연대는 낙동강전선의 동부지역을 돌파하려는 적 제12사단이 청송-죽장-기계-안강 축선으로 침공하여 포항을 점령하자 독립 제17연대 및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함께 이 지역에 투입되어 역포위작전을 전개한 끝에 적을 비학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장 임충식 대령이 포병부대가 포함된 북한군 제12사단을 계속 맹공하자 북한군은 봄, 여름, 가을 각 고지 일대에서 후퇴하여 겨울고지 및 안강 후방고지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뒤 아군이 진지를 구축하는 틈을 타서 때때로 침입해왔다. 연대장은 후퇴 중에도 보급 연락의 불편과 지형적인 악조건을 타개, 안강 및 기계를 점령할 결심으로 제2대대를 예비대로 연대전방지휘소에 대기시키고 제1대대와 제3대대를 공격제대로 하여 03시 45분에 겨울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또 한 결전 단계에서 제7중대가 공격하는 전면의 적 화력이 심하여 중대장이 흉탄에 쓰러지고 일시적으로 혼란상태에 봉착하자 연대장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7중대 OP까지 진출하여 적이 포기한 장비로서 탄약을 보급시키는 등 진두지휘를 통한 장병들의 사기를 고양하여 목표고지를 점령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한편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총 반격의 대열에 나선 수도사단은 도평리-영양-춘양을 거쳐 영월-평창-속사리로 진격을 계속하였으며, 10월 1일 전군의 최선봉으로 제3사단과 함께 38도선을 돌파, 양양-간성-양구-화천-신고산-안변을 거쳐 10월 10일 원산점령을 위한 공략에 나섰다.
동해 진출의 관문이며 요새인 원산공략을 목전에 둔 제18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야포 및 직사포 부대를 보유한 북한군 원산경비 제2여단 및 제246부대의 약 1개 대대 병력이 고원선에서 방어에 나섰다는 보고를 받았다.
적은 이미 계획했던 제2선의 견고한 진지를 이용하여 대기중에 있었으며 화력 배치가 견고하였다. 연대는 OP를 08시 30분에 출발하여 배화리를 경유 원산시 구마동으로 이동시킨 다음 적의 선제를 제압하고 강습적인 화력의 지원아래 원산 서북방 일부 시가에서 363명의 적을 사살하고 직사포 9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며 원산을 점령하였다.
이후 제18연대는 북진을 계속하며 함흥 공략에 임하였다. 후퇴를 거듭하는 적은 주력을 후퇴시키기 위해 소수의 엄호병력으로 기만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연대 CP를 정평리(定平里)로부터 흥사리(興士里)로 이동하고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려는 40여명의 적을 물리치며 공격을 개시, 흥사리를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10시에 함흥 시가에 돌입하였다.
때마침 시가전을 기도하기 위해 대기중이던 적을 연대장은 제2대대 전위중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전개하는 한편 제1대대와 제2대대로 하여금 후퇴하는 적을 포착.섬멸토록 하였다.
연패하여 패주하던 적은 봉강 어랑천 북안 일대 고지의 유리한 자연진지에서 제507여단 재편부대, 포연대 및 포 20문을 보유한 청진의 제41사단, 회문에서 증원된 해병 1개 연대 등 약 2개 사단 25,000명의 병력을 규합, 일대 결전으로 전세를 만회하려했다. 한.만국경을 목표로 북진중에 있던 수도사단장은 국군의 최선봉에 나서 파죽지세로 적을 추격하고 있던 제18연대로 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제1, 2차 공격개시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에서 적의 병력이 2개 사단 규모라고 판단한 사단장은 작전을 변경하였다. 적을 기존에 설치된 방어진지 밖으로 유도하여 격퇴하기로 결정하고 제18연대를 이동시켰다. 적은 제18연대가 제1, 2차 공격에서 피해를 입어 후퇴한 것으로 오인하고 2개 연대 병력으로 일대 반격전을 감행해왔다.
적은 아군의 의도대로 유도되었으나 오히려 한 때는 제18연대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력적이고 정확한 미 공군의 공중공격과 포지원, 제18연대 장병의 육탄공격으로 적을 섬멸한 후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이 공격에서 사단은 후방 제1연대를 지원 조공으로 제18연대 좌측의 어랑천 좌측을 담당하게 하고, 후방 예비대로 기갑연대를 배치하는 등 완전 1개 사단 병력으로서 일거에 방어선을 돌파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목표인 봉강을 점령하였다. 10여 일에 걸친 이 전투는 아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한 이래 처음으로 보는 적의 대규모 반격이었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청진 탈환을 위해 진격하던 수도사단이 나남에 진입할 무렵 45㎜직사포 10문과 전차로 무장한 북한군 제40사단 507연대 및 제570연대의 주력 2개 대대가 무산 가도로 후퇴하면서 일부 병력으로는 제18연대의 전진을 저지하고 동시에 그들의 후퇴를 엄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18연대 1대대는 대대 야간공격을 실시하여 21시에 적의 강력한 방어진지인 303고지를 탈취하였다.
청진 서남부의 외곽 방어고지인 303고지가 무너지자 적은 청진 북쪽의 회령과 웅기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11월 25일 제18연대는 여
명공격을 재개하여 청진 서북쪽 송정동까지 진출함으로써 청진을 점령하였다.
이후 부령 및 혜산진까지 진출한 수도사단 제18연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혜산진에서 흥남으로 이동, 12월 17일 흥남항에서 묵호항으로 해상철수작전에 돌입하였다. 묵호항에 상륙한 수도사단은 양양으로 진출하여 제9사단의 양양-서림방어선을 인수한 뒤 방어에 임하였다.
1951년 1월 28일 제3사단으로 예속 변경된 수도사단 제18연대는 중공군 및 북한군의 2월 공세로 횡성에서 철수, 제천을 거쳐 봉화산으로 이동하였다. 4월로 접어들어 인제로 진격한 제3사단은 한석산-경봉지구에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방어한 후 5월에는 현리 전투를 전개하였다.
1951년 2월 제2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된 임충식 대령은 8월에 전개된 제1, 2차 734고지 전투에 참여한 후 1952년 9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제7사단장에 보임되었다. 그후 10월에 제7사단을 지휘하여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 쟁탈전과 다음해 6월 선우고지 전투를 전개한 장군은 작전지역을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화천으로 이동, 별우지구 425고지 및 406고지 전초진지쟁탈전을 마지막으로 휴전에 임하였다.

 

 

월남전 "오작교 작전"    주월맹호사단장 유병현

 

오작교 작전은 당시 맹호사단이 주둔하는 퀴논에서 백마사단 북단 투이호아 까지 1번도로를

개통시키는 작전인데, 지금까지 베트콩들에 의하여 장악된 지역을 평정하여 남쪽과 북쪽 주민을 서로

만나게 한다는 뜻으로 작전명을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다는 오작교 작전으로 정했다.

 

미군 제101공수사단이 이 지역 투이호아 지역에 10개월간 있으면서도 개통작전에 실패했던 도로다.

작전을 앞두고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 장군에게

"그 작전은 절대하지 마시오. 그 지역 주변의 주민들은 전부가 베트콩들이요"하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드디어 작전은 시작되었다. 1967년 3월 15일 맹호사단은 북에서 남으로

백마사단은 남에서 북으로 적을 소탕하는 오작교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먼저 맹호와 백마사단이 적진 깊숙히 들어갈 지역에 미 제7전술 공군의 항공 폭격이 시작되어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우리 장병들을 태운 수백대의 미군헬기는 하늘을 까맣게 덮고

적진을 향해 날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 광경을 보면서 헬기에 의한 공중 기동작전은 한국군이 현대화로 가는 시험이라고

만족하게 생각했다. 작전이 시작된지 한달이 넘으면서 맹호와 백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곳곳에서 포착 사살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적들을 생포하여

이들을 통한 정보를 얻어내어 적들의 비밀동굴 진지를 폭파하는데 이용했다.

연 35일간 폭염이 내려쬐는 더위, 험준한 산악,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정글의 숲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군과 월남군이 난공불락으로 내세운 베트콩들의 푸엔성 본부를 파괴

소탕함으로써 드디어 남진하던 맹호와 북진하던 백마는 1번 도로상에서 맹호 유병현 사단장과

백마 이소동 사단장이 감격의 포옹을 했다.

 

 

1번 도로는 월남의 사이공과 월맹의 하노이를 연결하는 월남 제일의 동맥으로

휴전선 17도선 이남 지역의 1번도로가 개통됨으로서 군수물자와 산업설비, 통신, 기타

민간 버스까지도 신나게 달렸다.

 

이 역사적인 연결식에는 미군 장성과 월남 푸엔성장 내외신 기자들이 총 집결 되었다.

이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게 유력신문과 통신은 일제히 ‘한국군을 배워라, ’랑데뷰 작전의 성공,

‘맹호와 백마의 만남, 등으로 크게 보도했다.

 

오작교 작전의 전과와 손실을 요약하면 적사살 939명, 포로 425명, 귀순 297명, 소화기 681정,

공용화기 30문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전사자 23명이 발생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오작교 작전의 위대한 성공에 대하여 본인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군과 휘하 전 장병에게 만강의 치하를 보내며 아울러 무운 장구를 기원합니다."라는

치하 전문을 보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나의 군대 생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며 전략적인 방침과 장병들의 완전 무결한 전술적인 행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베트남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라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차례 연설을 했다.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을 매우 사려깊은 위대한 장군으로 보아왔고,

또한 채명신도 웨스트 모얼랜드를 감성적이고 탁월한 장군으로 존경했다.

이렇게 두사람의 관계가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모든 작전에 미군의 항공작전 지원과

군수물자 지원이 원활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기자들은 증언했다.

 

1967년 9월 27일 맹호부대 사단장 이취임식 사진 몇 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 채명신 주월사령관, 유병현 맹호사단장









 

 


 

1949년 성탄전야  유근창 중장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사령부에 감찰관으로 파견 나가 있는 동안 내가 겪은 가장 끔찍한 사건이 바로 1949년 12월 24일의 하봉작전이었다.

그날 산청에서 하봉으로 가는 산길에서 대대는 기습적인 폭설과 매서운 한파와 맞딱뜨렸다. 당시 공비토벌에는 제3연대 소속 제2대대가 투입됐고, 대대에는 노무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기습적 폭설·한파로 수백명 몰사

노무자들은 군수물자 운반을 위해 징발된 지역주민들이었다. 당시 군에서는 유사시 지역주민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평소에 대민지원 활동을 해 주곤 했었다. 그런데 사전에 그런 악천후를 예측하지 못한 탓에 대대에는 수많은 동상환자가 속출했다.지리산 현지 공비토벌사령부가 기상판단을 잘못해 생긴 엄청난 후과였다.

토벌에 나선 대대 행군에서 나는 병사들의 개인화기를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나는 청소년 시절을 함경남도 부전고원에서 자란 탓에 추위에는 매우 강했다. 그 당시 농촌 사람들의 신발이라야 짚신이나 고무신이 고작이었다. 이날 동원된 노무자들의 신발 역시 마찬가지여서 발은 순식간에 꽁꽁 얼어 붙었다. 그러다 보니 심한 경우 발이 썩어 들어가 부득불 수족을 잘라내기도 했다.

나는 그때 미군에서 쓰는 의료용 톱으로 한 노무자의 다리 뼈를 자르는 광경을 보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상이 온몸으로 퍼져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어떤 사람은 귀가 얼면서 당나귀 귀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가 하면 눈의 동공이 움직이지 않고 멎어 버리자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부대는 수많은 동상환자 가운데 중환자만 수십 명을 골라 남원 도립병원으로 후송했지만 의사가 태부족이었다. 상황이 그러하자 육군본부에서는 의무감 박동균(朴東均·소장 예편) 대령으로 하여금 의료진을 이끌고 남원으로 지원을 나가도록 조치함으로써 겨우 위급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그 당시 수백 명에 이르는 대대 병력이 전투가 아닌 기습 한파를 만나 몰사하다시피 했던 참상은 지금도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나는 그 후 전방 제2사단 31연대장 시절, 그 당시의 참상을 거울삼아 3박 4일간의 ‘혹한기 훈련’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 혹한 상황에 대비케 했다. 이어 제1군사령부 교육위원회에도 참여해 혹한기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렇게 해서 혹한기 훈련이라는 새로운 교육훈련 과목이 1군에서부터 전군으로 확산됐다. 군이 혹한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실제 훈련을 통해 사전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된다는 뼈아픈 교훈이었다. 육본 작전장교 시절 나는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훈장교 1, 2기와 생도 1, 2기 시험관으로 발탁돼 선발작업을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에서는 단기장교 양성은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후보생 과정)에서 수요를 충족게 했고, 선진국처럼 4년제 정규교육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방침이 결정됐다.

문교부와도 협의가 이뤄져 학사학위 수여도 결정됐다. 그러나 4년제를 실시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겨 과도적 조치로 생도 1기생은 2년제로 모집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 생도 1기생 338명이 1949년 7월에 입교해 최초로 2년간의 장기교육에 들어갔다.

'혹한기 훈련' 필수과목으로 지정

생도 1기생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준비와 경험을 보완해 자신감을 갖게 된 육군본부와 학교 당국은 4년제 정규과정의 생도 2기생을 모집하게 됐다. 이때 나는 작전국에서 생도 2기 시험관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미 생도 1기 시험관을 경험한 나로서는 생도 2기생을 반공의식이 뚜렷한 자로 선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시험관은 모두 10명으로 선임자는 유근창(柳根昌·중장 예편) 소령이었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 발표된 생도 2기생 모집광고는 당시 거국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학사학위를 수여하는 최초의 4년제 정규 장교 양성이라는 데 관심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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