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멋진 장군 "풍운의 별' 박정인!
1973년 3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갑작스러운 총성이 적막을 갈랐다. 북측 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원을 향해 기습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백골부대 장병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박정인(82·예비역 준장)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은 즉각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아군(我軍)에 대응사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즉각 사단 포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와 155㎜ 곡사포가 적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부상병을 구출하기 위한 연막탄도 작렬하며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 ▲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백골부대 사단장 출신인 박정인 장군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의 모든 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을 향해 돌진했다. 북한군은 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줄 알고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보복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장군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이유였다. 박 장군은 사단장 이임식에서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며 짧게 소감을 밝혔다. 평생을 바친 군(軍)이었지만, 후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박 장군을 만났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육사 출신인 그의 사무실 한쪽엔 '우리의 적(敵). 부정부패, 친북좌경세력, 적화통일북괴군'이란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박 장군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꺼내자 대뜸 "그렇게 두들겨 맞고, 교전규칙 운운하는 것들이 군인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180㎝에 달했던 체구는 굽었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울렸다.
"부하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데 대체 군 지휘부는 뭘 했단 말인가! 자주포가 고장 났다는데 군 검열단은 뭘 했단 것인가! 전투기는 뭘 했고, 훈련 중이었던 함대는 함포 사격을 않고 뭘 했나! 지하벙커에서 탁상공론만 하면서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박 장군은 최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이 모두 군의 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며 적절한 대응을 못한 장성들은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장군은 "군 지휘부는 상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 상황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요즘 장군 중엔 군인답지 못한 장군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연평도 피란민들에 대한 대응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적 도발 시 민간인들의 비상이주대책 수립은 필수"라고 비판했다.
박 장군은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패망하기 마련"이라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나 월남 패망은 군이 부정부패했고 정신력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가파' 살인집단인 북한에 대응하려면 역사안보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투철한 군인정신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뿐이에요."
장지량 前공군참모총장 “해인사 폭격 거부 처형될 뻔”
“내가 잘했다기보다 우리나라의 운수였던 게지요.”
4일 전쟁기념관 한국군사학회 사무실에서 만난 ‘노병’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우리나라 공군의 산증인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84)은 1951년 여름, 무더웠던 8월의 이야기를 마치 어젯일처럼 기억해냈다. 5일 출간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문화재청 역음·눌와)에 나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군인 장지량이 아니라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문화유산 지킴이’ 장지량의 소중한 이야기다.
“해인사라면 천년고찰이기도 하고, 더욱이 팔만대장경이 있지 않은가? 인민군이 불공을 드리러 간 것은 아닐 테고, 식량조달이 목적이라면 금방 철수할 것 아닌가? 그들이 철수한 뒤에 폭격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장 중령은 즉각 장덕창 비행단장과 김영환 전 대장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풀어놓았다. 두 사람도 흔쾌히 동의했다. 시간이 지나도 전투기가 뜨지 않자 미군 고문단 6146부대 윌슨 대위가 달려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왜 출격하지 않냐고, 명령 불복종이냐고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You know Paris? You know japanese Kyoto? 다급한 마음에 2차대전 때 독일군 폭격을 피해 무조건 항복한 와이장 파리 방위사령관과 일본 본토 폭격 때 고도(古都)인 교토만큼은 폭격목표에서 제외했던 미군을 예로 들었어요.”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일몰이 다가왔고 출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윌슨 대위가 ‘이승만한테 보고해서 목을 자르겠다’고 분기탱천하더군. 윌슨이라는 친구가 얼마나 ‘까칠’하던지…. 일개 미군 대위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승만 리’라고 함부로 부르고…. 험악한 말다툼이 벌어졌지.”
이 일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두 사람(장지량·김영환)을 당장 포살하라”는 명을 하달한다. 해인사를 지키려다 처형당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을 설득했고, 장지량·김영환 중령은 겨우 화를 면한다.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과 고려대장경판(국보 32호)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기록유산으로 나란히 등재됐다. 한 군인의 용기가 자칫 잿더미가 될 뻔한 문화유산을 구해낸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수난의 문화재~’는 장지량 장군처럼 ‘이름없이 빛도 없이’ 문화유산을 지켜낸 사람들 이야기다. 경복궁 자선당을 80년 만에 반환시킨 김정동 목원대 교수, 북관대첩비 반환에 큰 몫을 담당한 초산 스님 등도 현존인물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와 손홍록, 경천사십층석탑 반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 어네스트 베셀과 호머 헐버트, 광화문을 철거에서 지켜낸 야나기 무네요시와 설의식 등 13명의 이야기가 실렸다.
채명신 장군은… 6·25-베트남전 지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27일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평안남도 진남포 교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기독교 모태신앙을 갖고 있던 갓 스물의 채 총각은 성경공부를 틈틈이 해 교원자격증까지 따 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지역으로 진주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던 그의 부친과 종교가 문제가 됐다. 공산주의자들의 탄압대상으로 지목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지 석달 만인 12월 작고한 부친과 홀로 된 어머니를 두고 결국 월남할 결심을 하게 된다.
몇 차례의 탈출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서울에서 그는 1947년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48년 졸업 후 52년 미 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OAC)에 입소하기 위해 도미하기 전까지 혈기왕성한 중대장으로 송악산 전투, 태백산 게릴라 토벌전에 이어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온몸으로 치른다. 특히 51년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이끌며 백골병단(白骨兵團)이란 무시무시한 부대명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후 다시 53년 7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연대장과 참모장을 거치며 채명신은 '전장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린다. 58년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60년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파란 속에서도 정치군인으로 변신하지 않은 채 정통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채명신 장군은 69년까지 약 4년간 베트남의 밀림에서 '따이한'의 위력을 떨쳤다. 1972년 별 셋 중장으로 30년을 미처 못 채운 군문(軍門)인생을 마감한 그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특명전권대사로 82년까지 해외공관을 떠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의 견제라고 보는 이도 있다. 신군부가 들어선 후 83년부터는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대 연구원으로, 다시 일본 츄오(中央)대와 게이오(慶應)대 연구원으로 뒤늦은 유학 혹은 유랑생활을 보냈다. 2004년부터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와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금까지 역임하고 있다.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권과 감찰이 미치지 않는 해병대는 혁명의 사전 누설의 부작용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계획대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 1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해병 제 1여단은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진두 지휘에 의하여 완전 무장한 제 1대대는 제 2중대 제 1중대, 제 5중대의 순서로 서울 시가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공격 개시선인 염창교에 도착한 해병대는 박정희 소장의 일행과 합류하여 최초의 계획과는 달리 선두 부대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날 안성과 도봉산에서 훈련을 끝내고 밤 10시경 부대로 돌아 온 공수전투단은 혁명의 사전 발각으로 장 참모총장의 부대 장악의 엄명과 출동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의 감독으로 혼란 속에 출동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중 박소장의 내방과 함께 출동의 강행을 독촉받고 계획 시간보다 늦은 새벽 2시경에야 출동을 개시하여 해병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방 야전군 사령부 예하인 제 6군단 포병단은 장 참모총장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감쪽같이 맨 먼저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단 작전 참모 홍종철 대령과 군단 포병 사령관 문재준 대령의 긴밀한 연락하에 신윤창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포병 제 636대대, 정오경 중령 지휘하에 제 1중포 대대와 구자춘 중령의 제 933대대 그리고 백태하, 김인화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제 822 및 제 911대대가 새벽 3시 30분 예정대로 육군 본부 광장에 집결 완료하고 대기하였다.
그동안 제 506방첩대 본부에서 필사적인 저지를 지시하고 있던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사태의 불리함을 판단하고 새벽 1시 30분경 헌병 제 7중대장 김석률 대위에게 헌병 50명으로 한강교를 차단, 최후의 저지를 명령하고 제15범죄 수사대장 방자명 중령에게 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출동한 헌병대는 7대의 트럭으로 한강교위에 3단계의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응전 태세로 대비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한강교까지 진출한 해병대의 선두 제2중대와 충돌, 서울 장안의 고요한 새벽 하늘을 뚫고 군사혁명의 첫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피아간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중과부족의 헌병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혁명군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서울의 중심가를 향하여 진격을 계속, 요소요소를 점령하였으며 4시 30분경에는 서울시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던 시민들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는 요란한 총성과 병력의 이동 및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모두 문을 꼭 닫아걸고 영문을 모른 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새벽 5시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들려오는 군부 궐기와 무력 혁명의 소식은 이 정권의 오랜 독재 집권에 시달리고 4.19 이후의 혼란에 지친 가난한 시민들을 더욱 무서운 불안과 공포의 와중 속에 몰아 넣었다.
4시 30분경, 박정희 소장과 혁명 주동 장교들은 공수단 1개 소대를 인솔하고 남산의 중앙 방송국을 점령, 도피한 아나운서를 찾아내 준비된 혁명 성명서를 낭독하게 하였으며 이 성명서는 이날 새벽까지 혁명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의 소식은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15일 밤부터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광명인쇄소에서 사장 이학수와 함께 김종필 및 이낙선 소령의 지휘로 인쇄된 혁명 공약과 포고문 및 수많은 전단들이 서울 거리에 나붙었으며, 서울 시가는 집총하고 늘어선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1961년 5월 16일, 무력에 의한 군사혁명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거사에 성공한 군사혁명의 주동자들은 16일 상오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내의 모든 항만 및 공항의 봉쇄와 함께 이날 오후에는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 제4호를 통하여 정권의 인수를 선언함과 동시에 민. 참의원과 지방의회의 해산과 정당. 사회단체의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드디어 18일 오후, 그동안 "갈멜 수녀원"에 피신중이던 장면 국무총리가 중앙청에 나타나 9개월간 집권하여 온 정권을 정식으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인계함으로써 거사는 완전히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 오전 9시에 군사 혁명 위원회(5월 19일 국가 재건 최고회의로 개칭)에 의하여 선포되어 1962년 12월 6일까지 계속된 5,16혁명 군사정부는 1963년 12월 17일 제 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2년 반 이상 집권을 하게 되었다.
김성은 국방부장관
김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비롯, 해병대 창설과정, 해병대가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게 된 배경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를 털어놨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64년 1월 김 전 장관과 박종규 경호실장, 이원엽 소장(육사5기)을 대동하고 유성에서 꿩을 사냥했다. 사냥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점심 메뉴로 경호실에서 준비한 쇠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무작정 사냥터 인근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소금을 뿌린 쇠고기 구이를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거지 몇 명이 경호실 요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다가온 것.
박 전 대통령은 "오라고 해라. 함께 먹자"라고 그들을 부른 뒤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우리를 보고 거지 친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주변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은 "어때. 거지가 지프 타고 다니는 것 보았나?"라며 파안대소했다는 것.
그해 4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차 진해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스톱을 전혀 모르던 김 전 장관은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 등의 훈수로 화투판을 휩쓸었다는 것.
이 때 박 전 대통령이 "김 장관, 고스톱 쳐 본 적 없다면서? 그런데 판마다 다 휩쓸어? 이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맞구먼"이라고 조크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해병대사령관이었던 김 전 장관의 명령 없이 해병 부대가 움직였던 일화도 소개됐다.
5월 16일 새벽 당시 고길훈 부사령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김포 해병여단 일부 병력이 오늘 새벽, 탱크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6년 전 자신의 부하였던 김동하 예비역 소장의 꼬임으로 당시 김포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이 1개 대대 병력과 전차 중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했던 것.
해병대가 사령관의 명령 없이 쿠데타에 참가한 것을 뒤늦게 전해들은 맥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없이 김포 해병대가 출동해 혁명에 가담했다. 이는 작전지휘권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 행위다. 지금 당장 출동해 해병대를 복귀시키라"고 호통을 쳤다.
맥루더는 윤보선 대통령에게도 반란군 진압을 위한 작전권 승인을 요청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부터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으로 장 면 씨와 갈등을 빚어온 윤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당시 혁명정부는 미국 측에 확고한 반공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6층 규모의 반공연맹 총본부(현재의 타워호텔) 건물을 남산에 신축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을 상징해 16층 짜리 건물로 신축했으며 각 층에 참전국의 대표를 상주시킬 계획이었으나 참전국에서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한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일화도 공개했다.
해병대의 통영 상륙작전의 전과를 취재하러 온 외신기자들에게 전과를 소개하는 도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정말 놀랍다. 귀신 잡는 해병이다"라고 보도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것.
임충식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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